*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96년도에 소시에르에서 발매한 <지오 슬레이브 ~가련한 노예들의 초상~>입니다.
당대 유행했던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게임으로
노예를 육성한다는 소재와 지오 슬레이브라는 제목은 조교 시뮬레이션은 연상시키지만
H한 조교가 아닌 격투 방향의 육성을 소재로한 게임이죠.
내막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사는 도시에서는 '슬레이브 택틱스'라는 이름의
노예가 투기장에서 결투하는 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 대회의 지배인이죠.
주인공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슬레이브 택틱스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무시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아버지의 슬하에서 나와서 자신만의 노예를 육성합니다.
슬레이브 택틱스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실력을 보임으로써
슬레이브 택틱스를 폐지하려는 계획이죠.
'노예 격투 대회 폐지를 위해서 노예 격투를 한다'는
실로 모순적인 행위를 일삼는 주인공이지만
주인공 스스로도 자신이 하는 일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주인공의 고뇌도 이 게임의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본래 날개가 있는 종족이었으나 도주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노예 사냥꾼들이 잔인하게도 날개를 잘라 버렸습니다.
날개를 잘려 그냥 가련한 소녀가 된 피나입니다.
이런 가련한 노예를 격투 대회에 내보내서
어떠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보낸 라이벌 게일, 그리고 그의 전투노예와 승부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피나를 고작 4일 육성해서 저런 근육질의 남자를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하지만 이 게임의 난이도는 의외로 높지 않은 편인데
비결은 바로 '웨이트 리프트'와 '체력 보충제'입니다.
'웨이트 리프트'는 훈련의 한 커맨드인데
전투에 필요한 'HP', '공격력', 거기에 훈련에 필요한 '체력'이 모두 올라가는
효율이 너무나도 좋은 커맨드입니다.
두 번째로 상대하게 되는 적의 이름은 다리아입니다.
'체력보충제'는 가격이 500골드밖에 안 하는데
체력을 언제나 풀로 채워주는 아이템이죠.
계속 약 먹이면서 웨이트만 계속 시키면 무적의 노예를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로이더 시뮬레이션 같네요.
역시 피나에 비해 강력해 보이는 비주얼입니다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한 후에는 게일이 다리아에게 화풀이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다리아를 도와줌으로써 다리아도 주인공의 노예로 할 수 있습니다.
다리아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며
노예들을 위하는 주인공의 숭고한 뜻은 잘 알 수 있었습니다만
그런 숭고한 목적이 있다면 노예들 옷이나 제대로 입혀줬으면 좋겠네요.
노예들이 다 드러난 복장으로 쇠사슬로 묶여 있으니
훈련 장면을 블로그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제 주인공에겐 연약해 보이는 피나만 있는 게 아니라
강력한 여전사로 보이는 다리아가 가세했습니다.
이제 게일이 무슨 노예를 데리고 덤벼오든 간에 겁먹을 필요가 없죠.
다음 시합에서는 웨이트 리프트를 만땅으로 한 다리아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아니, 이 대회에는 심판도 없나요?
저건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데 참가시켜도 되는 걸까요?
아무튼 대충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게임입니다.
노예를 육성하며 열흘마다 대결이 있는 방식인 거죠.
훈련 파트를 한 번 살펴 봅시다.
'대화', '훈련', '노동', '휴식', '아무 것도 안 한다'가 있습니다.
왜 대화와 휴식, 아무것도 안 한다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군요.
심지어 '휴식'이 아니라, 대화나 아무 것도 안 한다를 고르면
훈련을 안 했는데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체력보충제의 효과가 너무 좋아서
휴식 안 하고 약이나 빠는 게 더 이득이죠.
훈련은 '런닝', '스텝업', '검술교련' 같은 게 있는데
이번에도 '웨이트 리프트' 효과가 너무 좋기 때문에 다른 게 필요가 없습니다.
엔딩 조건 때문에 다른 것도 약간 해줄 필요는 있습니다만
거의 필요가 없는 수준이죠.
노동은 '주점', '현장', '시장' 등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올 수 있는데
노동할 시간에 약으로 몸을 만들어서 대회에서 상금을 타오는 게 더 이득입니다.
노동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난이도가 쉽고 다양한 커맨드를 모두 사용할 필요가 없다 보니,
육성 파트가 약간 지루한 편입니다.
육성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만 맞춰주면 충분히 엔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많이 육성할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엔딩 조건은 육성보다는
육성과는 전혀 별개인 대화 횟수에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차라리 이 게임이 조교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조교 수준에 따른 캐릭터들의 태도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었겠죠.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진행수준에 따른 캐릭터들의 태도 변화를 크게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이 게임은 육성에 따른 캐릭터들의 태도 변화보다는
노예들의 안타까운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주인공과의 이벤트는 대부분 H씬과 관련되어 있어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게임이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게임답게
노예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묘사할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 했던 거죠.
최후의 희망은 육성에 대한 중간평가입니다.
그러나 중간평가가 되는 슬레이브 택틱스조차도 난이도가 너무 쉽고,
노예는 4명을 육성하는데 출전할 수 있는 캐릭터는 단 한 명입니다.
게임 진행 중에 눈에 띄는 육성 결과가 안 보여요.
라이벌의 포스가 약한 점도 아쉽습니다.
강력하고 재수없는 라이벌이 있어야 그 라이벌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의욕이 생길 텐데 그런 의욕이 잘 안 생겨요.
라이벌인 게일은 외관에 비해 생각보다는 재수없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주인공만 계속 승리해 버리니 게일의 캐릭터가 로켓단스러워 집니다.
7연승, 8연승한 적에게 어떻게 포스를 느끼겠습니까?
초반부 이외에는 주인공이 패배해도 게임오버는 아닌 것 같지만
난이도가 너무 쉽다보니 일부러 패배하지 않는 이상
패배할 일이 없었죠.
이 게임의 소재는 좋았고, 전반적인 디자인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세세한 점에서 지루함을 없애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00일이나 되는 기간동안 4명의 노예를 육성하는데
한 60일동안이 지루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난이도가 약했다는 점이었던 것 같아요.
난이도가 적당히 어렵고,
4명의 노예를 각각 육성하고 활용할 때 전술, 전략 등을 수립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총평하자면, 당대의 육성 시뮬레이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인
지루함을 극복하지는 못한 게임입니다.
특히 이 게임은 지루함을 덜어줄 수 있는 요소가 눈에 확연히 보임에도
그런 요소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전반적인 설정과 캐릭터는 꽤 괜찮았습니다.
단점을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게임이라도 짧았다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