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9일 일요일

리뷰 : 몽환야상곡(1995/4/24,ApRicoT)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ApRicoT은 CROSSNET 계열의 회사입니다.
이 회사 계열의 게임 중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AYAKASHI>나 <메이플 컬러즈>였죠.
그 외 유명했던 게임은 오메가스타의 <그녀x그녀x그녀>로 상당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고
<별하늘의 메모리아>나 <형형색색의 세계> 등을 만든 FAVORITE도 괜찮았습니다.

이 CROSSNET은 2009년에 갑자기 망해 버려서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으나
후일 ApRicoT, 오메가스타, FAVORITE는 각각 독립한 회사로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되살아난 이후 오메가스타는 <미소녀만화경> 시리즈로 여전히 주목받았고,
FAVORITE도 나름 꾸준히 관심을 받고 있는 반면,
ApRicoT은 아직도 망한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도 있을 정도로 
별 존재감이 없습니다.



이번에 리뷰할 게임은 ApRicoT의 <몽환야상곡>이라는 게임입니다.
PC-98 시절의 대표적인 저택물이죠.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대학생인 주인공은 여름방학동안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산 속에서 태풍을 만나 절벽에서 떨어져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깨어나 보니 주인공이 있던 곳은 서양식 저택입니다.
저택은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휩싸인, 폐쇄된 공간으로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저택의 여주인은 '문은 때가 되면 열릴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이 폐쇄된 저택에는 다양한 고민을 지닌 여성들이 있습니다.
저택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고민들을 해결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입니다.



주인공은 저택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나 저택의 비밀같은 건 별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초자연적인 저택의 구조가 대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게임 내에서 아무 설명도 없죠.
애초에 게임의 목적이 그런 요소들과 전혀 동떨어져 있죠.

이 게임에서 저택은 고민을 가진 캐릭터들의 도피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택은 공간적으로 현실세계와 단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일부 캐릭터들의 고민은 상당히 오래 되고, 스케일이 큰 고민도 있는데
최악의 결말 직전에 시간을 멈춰서 
고민 해결을 기다리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각 캐릭터들이 저마다 처한 상황이 제각각이다 보니
독특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유라'라는 캐릭터의 경우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이
오랫동안 창고 안에서만 갇혀 살아 일반 상식이 부족한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는,
주인공이 쥐구멍 너머로 보였기 때문에 주인공을 '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부류의 캐릭터는 제대로 묘사하기 상당히 어려운데
이 게임은 능숙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게임의 문제점은 쓸데없이 늘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게임 플레이가 지루해진다는 점입니다.
플레이어가 다닐 수 있는 장소가 너무 많고
진행이 막히는 부분이 너무 많아
저택의 모든 곳을 공허하게 돌아다닐 뿐인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원할한 게임 진행에 방해가 됩니다.

각 캐릭터들은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민이 해결된 이후에도 저택에 계속 남아
주인공과 다양한 대화를 하고, 
때로는 다른 캐릭터들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 시절 게임치고는 캐릭터 활용이 굉장히 좋은 편이죠.

문제는 별 의미없는 대사가 많아져 게임이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옛날에 방영했던 대하사극같은 느낌입니다.
옛날 대하사극 같은 경우는 한 사건이 터지면 
온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장면이 있었죠.
'왕건아우가 이겼다고?', '왕건이가 또 이겼단 말인가!', '왕장군이 이겼다는구나, 허허.'
하면서 그냥 한 편을 때워 버리며 억지로 분량을 늘리는 거죠.  

이 게임도 그런 느낌입니다.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여러 캐릭터들이 한 마디씩 하는데,
그것도 이벤트 취급이기 때문에
저택을 다 돌아다니면서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봐야 해요.
너무나도 귀찮은 방식입니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단일 루트로 진행되지만
마지막에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각 캐릭터의 엔딩을 볼 수 있는 
멀티엔딩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이외에는 아무 차이도 없기 때문에
멀티 엔딩이라기보다는 후일담에 가까운 구성이네요.



총평하자면, 폐쇄된 공간과 서양 저택의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나리오가 곁들여져
인상깊은 장면이 많았던 게임이었습니다.

다만,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에 많이 의존한 게임이었는데
게임 시스템이 시나리오를 쾌적하게 즐기기에
좀 방해가 되었던 것이 유감스러웠습니다.

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리뷰 : 마법소녀 B코(1996/3/15,ScooP)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게임은 ScooP라는 회사의 <마법소녀 B코>라는 게임입니다.

에로게 업계에서 마법소녀물이란
사람들의 기대를 가장 많이 배신하는 작품입니다.
재미가 기대에 못 미친 경우도 있었지만
장르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하고 다른 경우가 많았죠.

대표적으로 <마계천사 지브릴4>가 있습니다.
저는 <마계천사 지브릴> 시리즈가 에로게 마법소녀물 중에서도
비교적 소프트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충격적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오프닝 영상이 너무 샤방샤방하게 나온 나머지
<마계천사 지브릴> 시리즈를 잘 모르는 분들은 내용도 아름다울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마법소녀 B코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게임 중 하나입니다.
스토리를 살펴 봅시다.



빛의 마법세계 프린세스인 B코는 수행을 위해서 인간계로 오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B코의 사역마로 이름은 알파라고 합니다.

B코는 귀여운 외관과 달리,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입니다.
B코는 주로 학생들에게 마법으로 H한 장난을 치는데
주인공에게 나쁜 짓을 도와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죠.
주인공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초능력 맛 좀 보기 싫으면 처신 잘해야죠.



그러던, 어느 날 대마도사 사브리누라는 사악한 음마가
촉수를 이용하여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참고로 에로게에는 '마법소녀물에 마법소녀는 안 나와도, 촉수는 꼭 나와야한다.'는 
법칙이 존재합니다.



사브리누의 강력한 마법에 의해 위기에 빠진 B코였으나
B코의 친구이자, 어둠의 마법세계 프린세스 C코가 도와줍니다.
사브리누는 도망쳤지만, 언제 다시 나타나 B코를 위협할지 알 수 없습니다.

사브리누의 힘의 원천은 처녀의 엑기스입니다.
그리고 C코가 쳐놓은 결계로 인해 사브리누는 학교 부지 밖으로 나갈 수 없죠.
그리하여 B코는 엄청난 꾀를 내는데,
그 꾀란 바로 '학교에 처녀가 없으면 사브리누는 힘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주인공이 꽃미남으로 변신하여
학교의 처녀 전원과 H를 목표로 한다는 스토리입니다.
지역주민 처녀상실 프로젝트라는 거죠.
지금까지 소개한 그 어떤 헌팅물보다도 원대한 스케일의 게임입니다.


뜬금없이 해괴한 임무를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주인공이었으나
다행히도 주인공은 스스로의 헌팅 스킬에 꽤 자신이 있습니다.
B코의 명령대로 주인공은 학교에 잠입하여 여학생들에게 말을 겁니다.



처음 학교에 들어서서 풍기위원 유리를 만났습니다.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선택지가 뜹니다.

1) 나는 사랑의 천사☆
2) 이름 같은 건, 옛날에 잊어 버렸지...
3) 아가씨~! 나랑 차 한 잔 할래~?

이렇게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는 처음입니다.
몇 번을 읽어봐도 정답이 없는데요?
뭘 고르든지 간에 주인공은 변태로 오해를 받게 됩니다.
당연한 결과죠.



옥상에서 케이코를 만났습니다. 선택지를 살펴 봅시다.

1) 좋은 날씨네. 근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2) 나랑 같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래?
3) 남녀 사이에, 우정은 존재한다고 생각해?

아무리 봐도 첫만남에서 할 얘기가 아닌 선택지도 보이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정답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뭘 선택하든 간에 욕만 먹는 주인공입니다.
확실히 쳐맞아도 싼 선택지도 있었지만
뭐하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요.



초반에는 다소 자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중반부부터 주인공이 이사장의 손자를 사칭하고 다니고,
학생들과 친분을 계속 쌓으면서 
이 시절의 평범한 헌팅물이 됩니다.



헌팅물로서는 크게 나쁜 점이 보이지 않는 게임이지만
아쉽게도 마법소녀물로서는 애매합니다.
장르의 정체성이 흔들릴 정도로 B코의 비중이 많지 않아요.
주인공이 사역마라는 것도, 주인공이 헌팅하는 목적도
그렇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총평하자면, 마법소녀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군요.
요란한 설정의 헌팅물이 좀 더 이 게임의 본질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헌팅물로 생각하면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습니다.

옛날에나 지금이나 별 특색없는 에로게는 넘쳐납니다.
리뷰하려고 플레이해봐도 별 할 말이 없어서 포기하는 게임들이 한 두개가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평범한 헌팅물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설정이 있는 이 게임은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리뷰 : 아르바이트 ~두 사람의 마음~(1995/7/28,ANGE)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두 사람의 마음~>입니다.
멀티 시점으로 남녀의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그린 게임입니다.

시작하면 남, 녀 두 사람 중 누구를 플레이할지 고를 수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남자 주인공 이름은 직접 짓더라도
여성 이름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게임은 여성 이름까지 만들 수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디폴트 이름은 남자는 히코이치, 여자는 카오리입니다.



우선 남성 시점부터 시작해 봅시다. 
주인공은 클래스메이트인 카오리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야심차게 계획했던 종업식날 고백은 실패하였으나
카오리가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엿듣게 됩니다.
주인공은 여름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번 후,
선물과 함께 고백을 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아르바이트는 '탐정사무소', '호텔', '축구장', '가정교사', '해수욕장', '사진관',
'병원', '백화점'으로 총 여덟 개가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는 일주일씩하게 되며
여름방학동안 여섯 개의 아르바이트만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아르바이트 장소에는 저마다 개성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다양한 선택지를 통해 각 캐릭터들과 호감을 올릴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멀티 엔딩도 존재합니다.



불만스러운 점은 그래픽이 굉장히 잘 뽑혔고,
각자의 개성도 출중한데
정작 스토리는 별볼일 없다는 점입니다.

차근차근 호감도를 높여가는 괜찮은 스토리도 있지만,
개그만 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H씬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양하고 특색있는 스토리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너무 부실해서 좋게 평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픽은 마음에 들지만 CG의 수에는 불만이 있는데,
H씬 이외의 CG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르바이트의 여덟 캐릭터를 합쳐서
위험하지 않은 CG는 단 한 장뿐입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이 한 장을 만든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심지어 스탠딩 CG도 캐릭터당 하나 뿐입니다.
다른 포즈도 없고, 다른 표정조차 없습니다.
95년도라면 대부분의 게임이 표정 몇 개정도는 갖추고 있을 때인데요.
그래픽이 괜찮은 게임이다보니 어색함이 더더욱 두드러집니다.
판넬 세워 놓고 대화하는 느낌이 특히 강하게 드는 게임이었습니다.



처음에 남자, 여자 누구를 고르더라도 그 스토리가 끝나면 
바로 이어서 다른 성별의 스토리를 골라야 합니다.
멀티 엔딩 게임인데 엔딩을 보기에 상당히 불편한 시스템이죠.

아무튼 이번엔 카오리 시점의 스토리입니다.
카오리 역시 주인공을 좋아하고 있었으나
용기가 부족해서 학기내내 고백 한 번을 못했죠.

주인공처럼 여름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주인공과 같은 장소를 골라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데
정작 주인공과 접점이 많지 않습니다.
그냥 주인공과 같은 패턴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카오리의 아르바이트가 전개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 내내 남자 얼굴만 쳐다보다 끝나는 스토리도 있습니다.
엔딩을 위해서 H씬을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는 카오리마저 나오지 않으니 계속 남자만 보면서 플레이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여성향 게임인가요?
차라리 여성향 게임이었으면 꽃미남이라도 나왔을 텐데
마음에 안 드는 아저씨만 계속 나왔어요.

스토리도 불쾌했을 뿐더러
H씬만 시작되면 카오리의 캐릭터 붕괴가 심각했습니다.
주인공 시점에서 쌓아 온 카오리 이미지에 악영향만 끼쳤어요.



총평하자면, 멀티 시점의 매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게임입니다.
주인공 히코이치 시점의 이야기는 약간 부족했지만 괜찮은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캐릭터가 잘 짜여져 있었죠.

하지만, 카오리 시점의 이야기는 존재 이유가 없었습니다.
레즈 플레이 등 카오리 시점에서도 재미있는 상황은 어느 정도 있었어요.
하지만, 많은 스토리가 엉성했고, 주인공 스토리와 접점도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영향마저 끼쳤고
그런 주제에 스킵이 불가능해서 멀티 엔딩을 보는 데 방해만 되었습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발목을 잡은 부분이 더 컸다고 봅니다.

차라리, 멀티 시점 시스템을 빼고 
히코이치 시점에 집중했더라면 더 좋은 게임이 됐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표정 하나없는 판넬이라도 수정됐을 테니까요.

2020년 11월 8일 일요일

리뷰 : KISS(1992/8/1,ANGE)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ANGE라는 회사에서 발매한 <KISS>입니다.
인지도는 별로 높지 않았으나
당시 플레이한 사람들은 이 게임을 대체로 좋게 평가하였습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는 
근처의 '성 안제 여학교'와 매년 학교 축제를 같이 열고 있습니다.
이 학교 축제에는 하나의 관습이 있는데 
축제 전에 주인공 학교의 대표자 한 명이 
'성 안제 여학교'의 학생회장에게 축제 승낙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번 대표자는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성 안제 여학교를 돌아 다니며 여러 여성들과 만나고 다니게 됩니다.



게임은 일단 '프리 액세스 모드'라는 명령 선택식으로 진행됩니다.
학교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보다', '이야기하다', '이동'을 선택합니다.



이 게임의 핵심인 '투샷 모드'입니다.
선택지를 통해 다양한 대화를 나눕니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왼쪽의 과일이 하나씩 떨어지게 됩니다.
과일이 전부 떨어지면 게임오버죠.
선택지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프리 액세스 모드'에서 각 캐릭터의 성격을 조사하고 힌트를 얻을 수도 있죠.

선택지를 잘 고르면 '랑데부 모드'라는 H씬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각 캐릭터과 H씬이 끝나면
애니메이션으로 키스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게임의 기본적인 구성입니다.
시스템도 독특한 점이 없고, 
스토리도 큰 사건없이 평이하게 진행됩니다.



이 게임의 인기 비결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빠져들게 하는 오묘한 텍스트죠.
리뷰로 이 게임의 매력을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직접 플레이하더라도
28년이나 된 지금 이 게임의 장점을 찾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고,
이 게임의 장점은 오래 남기 힘든 요소니까요.



이 게임의 역사적 가치는 바로 에로게 최초의
'캐릭터별 엔딩 구현'입니다.
<동급생>보다 4개월 빨랐죠.

이 게임이 캐릭터별 엔딩을 잘 살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일 스토리를 쭉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엔딩 볼 캐릭터만 선택하는 수준이죠.

그러나, 캐릭터별 엔딩은 최근까지도 
에로게에서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스템인만큼
최초를 선점한 것은 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총평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이 게임의 매력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92년도에 이 게임을 플레이한 분들은 이 게임을 대단히 높이 평가합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 있는가 하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 공유하는 작품도 있는 거죠.

지금은 평이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트렌드를 선도했던 신선한 매력이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2020년 11월 1일 일요일

리뷰 : ROSE BLOOD ~피의 갈증~(1996/9/13,아아루)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아루는 1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역사를 지닌 회사입니다만
에로게 역사에 무시할 수 없는 임팩트를 남긴 회사입니다.
바로 '에로게 최초의 전량회수'의 위업을 달성한
희대의 문제작 <코코로>를 발매한 회사죠.



아아루의 첫 작품인 <ROSE BLOOD ~피의 갈증~>입니다.
<코코로>보다는 못 하지만 과격한 스토리와 H씬을 갖고 있는 탐정물이죠.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레이코라는 여성이 야심한 밤에
공원에서 강X범의 습격을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행위 도중에 공원을 지나가는 남성이 있었고
범인은 범죄를 멈추고 도망가 버립니다.

지나가던 남성은 레이코를 도와주려고 다가오는데
갑자기 레이코가 아는 척을 합니다.
알고 보니 도와 준 남자는 레이코와 고등학교 동창인 케이였던 거죠.



케이에게는 탐정을 하고 있는 친구, 레츠가 있습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이죠. 
주인공은 소꿉친구이자 애인인 미즈키와 함께 탐정업으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주인공과 미즈키 역시 피해자인 레이코와 동창이기도 합니다.

레이코는 주인공에게 범인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맡깁니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동창따위 기억도 안 나고,
의뢰 내용도 위험해 보여 탐탁지 않았지만 어쨌든 의뢰를 받아 들입니다.

범인은 경찰이 비밀리에 수사하고 있는 연쇄 강X범입니다.
신고된 피해자만 벌써 여덟 명이죠.
주인공은 알고 지내던 경찰에게 피해자 명단을 받아 옵니다.
사무소에서 명단을 살펴 본 미즈키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한 눈에 찾아 내는데
피해자 전원이 주인공, 미즈키와 고등학교 클래스메이트였던 겁니다.
여덟 명이나 당할 동안, 이 정도 공통점도 못 알아낸 경찰들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은 범인이 같은 반이었던 남학생 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해당 클래스에는 남성 13명, 여성 12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들은 벌써 대부분이 살해당한 상태입니다.
경찰은 각 사건들이 관할이 달라서 잘 몰랐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범인 좋은 날은 다 갔습니다.
용의자는 좁혀졌고, 다음 피해자가 누가 될 지도 다 파악했으며,
이제 주인공 탐정이 직접 나서서 범인을 추적하는 겁니다.
범인이 지금까지처럼 자기 편한대로 활개치지 못하겠죠.

...과연 어떨까요?
이후의 스토리를 살펴 봅시다.



주인공의 모교에서 선생님이 된 동창 후지타니입니다.
오랫만에 재회한 후지타니 선생은 주인공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지만
이미 애인이 있는 주인공은 선생에게 관심도 없습니다.

후지타니 선생은 학교 도서관에서 습격당합니다.
경찰은 없고, 경비도 없고, 주인공의 대책도 없이
허무하게 습격당하고 맙니다.

뭐, 학교 도서관에서 습격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범인이 방심한 틈을 노려 허를 잘 찌른 거죠.
게임 내에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합시다.


그 다음 피해자는 또 다시 레이코입니다.
말했다시피, 행위 도중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습격을 당한 거죠.
이번에도 역시 경찰도 없었고, 주인공도 아무 대책도 없었습니다.

뭐, 이미 습격당했던 피해자가 다시 습격당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허를 찔렸다고 칩시다. 아무 설명도 없지만요.



그 다음 습격당한 건 회사원 동창 요코입니다.
주인공은 요코에게 위험을 알려주기 위해 집으로 찾아 갔지만
안타깝게도 요코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 집에 없습니다.
주인공은 '나중에 다시 오지, 뭐'라고 생각하며 돌아 갑니다.

요코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다음 날 새벽, 인적 드문 곳에서 조깅하다 습격당합니다.

아니, 범죄가 임박해 있는데 집에 한 번 찾아가고 끝인가요?
퇴근 시간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지는 못하더라도
우편함에 위험하다는 메모라도 남겨 주든가
옆집 사람한테 연락처 주면서 전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든가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라도 걸어 보든가 방법은 많잖아요.
게다가, 주인공은 바쁘다 쳐도 경찰은 한 명정도 집 앞에서 잠복하고 있었어야죠.
이따위로 할 거면서 왜 비밀수사를 한 겁니까?

결국 탐정과 경찰의 무관심 속에 요코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산책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범인이 제일 부지런하군요.



이제 피해를 받지 않은 여성 동창은 단 두 명이 남았습니다.
주인공의 연인 미즈키를 제외하면
최후의 1인인 키요네입니다.

이번만큼은 범인에게도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키요네는 기자로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조사해 봤으며,
동창들이 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냈습니다.
미즈키 아니었으면 평생 못 알아냈을 주인공보다 더 실력이 있군요.
게다가, 키요네는 주인공과 예전에 사귄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과 돈독한 관계라는 거죠.

최후의 2인이라서 경찰들도 철통같이 지킬 것이고,
키요네는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서 스스로 조심할 것이며,
주인공은 옛 연인인 키요네가 쉽게 습격당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키요네가 습격당하는 장면입니다.
키요네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립니다.
키요네는 '누구세요~'하며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있는 건 범인이라서 그대로 습격당하게 됩니다.

자신이 다음 피해자가 될 거라는 걸 아는 사람이
고작 초인종 소리에 왜 이렇게 쉽게 문을 열어주는 거죠?
부모님이 초인종을 누르더라도 이보다는 조심할 텐데요.

게다가, 주인공하고 경찰은 대체 뭐하는 겁니까?
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 거죠?
집 앞에 잠복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범인이라도 잡았잖아요.



마지막에 남은 건, 주인공의 연인 미즈키뿐입니다.
게임 종반에는 감기에 걸려 침대에만 누워 있죠.

다행히도 미즈키는 습격당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잘 지킨 게 아니라, 범인이 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인공을 먼저 처치하고 노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소거법으로 남자 동창 13명 중에서 범인을 추려 냅니다.
여기서 소거법이란 나머지는 다 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의 친구 케이는 살아 있지만 결백한 게 확실하죠.
레이코가 범인에게 습격당할 때 지나가다 도와줬으니까요.

주인공이 범인의 은신처를 추적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범인이 폐병원으로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 오죠.
미즈키를 습격하려는 유인책일 수도 있었지만
경찰들이 '여긴 우리들이 지킬 테니 안심하라'고 합니다.
진작에 이렇게 했다면 요코와 키요네는 무사했을 텐데 말이죠.

주인공은 친구 케이와 함께 폐병원으로 갑니다.
갑자기 습격해 온 범인과 사투를 벌인 끝에 약품을 이용해서 범인을 태워 죽이죠.



동창들이 모두 습격당하고 살해당했지만
내 알 바 아니고 미즈키와 잘 살았다는 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스토리가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습니다.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추리물의 경우에는 
경찰과 탐정이 어느 정도 무능하게 그려질 때가 있습니다.
연쇄살인이 진행되기도 전에 범인이 잡혀 버리면 안 되니까요.
이 게임에서는 무능한 수준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선을 넘었어요.

범죄를 막으려는 주인공과 그 계획을 비웃는 범인의 머리싸움을 그릴 수도 있었고,
주인공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습격당하는 
불행한 우연을 그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범죄는 못 막더라도
주인공이 여러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는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고,
동창들과 각별한 우정이 있어서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묘사할 수도 있었고,
하나 둘 씩 습격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다음에는 
주인공이나 연인 미즈키가 당하는 게 아닐까하는 공포와 압박을 표현할 수도 있었겠죠.

놀랍게도 이 게임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내용이 없어서 뭘 하고 싶었던 건지, 할 생각이 있긴 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뭐,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겠죠.
PC-98 게임에는 분량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게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내용을 빼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추리물에 논리가 부족한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에로게에 에로가 부족한 건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내용이 말이 안 되더라도 에로에 충실하려고 했던 거죠.

차라리 동창이라는 설정을 빼 버렸으면 좋았을 겁니다.
특정된 몇 명이 아니라 불특정다수가 습격당하는 스토리였다면 
탐정이나 경찰이 이렇게까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일은 없었겠죠.



이 게임은 멀티엔딩 게임입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내용은 해피엔딩의 스토리이고
다른 루트에서는 주인공이 사망하고 남겨진 미즈키는 친구 케이가 맡는다는 엔딩도 있죠.

해피엔딩에서 밝혀지지 않은 중요한 떡밥은 바로 불에 타 죽은 범인입니다.
갑자기 습격당하는 바람에 범인과 대화도 제대로 못 해봤고,
시체가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그게 진짜 범인이 맞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죠.
이 진실은 다른 루트에서 밝혀 집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주인공이 추측했던 그 동창이 범인 맞고,
불에 타 죽은 시체도 범인이 맞습니다.
이러면 신원을 알지 못하게 불로 태운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스토리 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데 
만일 그 시체를 태우지 않았더라면 
제가 다른 루트를 볼 생각도 안 하고 이딴 게임 진작에 꺼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죠.



분기는 미즈키에게 집에 혼자 돌아가라고 했다가 미즈키가 습격당하는 장면입니다.
다행히 뒤늦게 쫓아온 주인공이 이단옆차기로 범인을 쫓아 버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아무 것도 안 하는 건 해피엔딩 스토리와 똑같지만,
해피엔딩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던 친구 케이가 이 루트에서는 목이 잘려 살해당하고, 
주인공 탐정 사무소에 소포로 머리만 배달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케이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케이는 범인을 먼저 만나서 역으로 그 범인을 죽여버리고
범인의 머리를 위장해서 소포로 보냈던 겁니다.

주인공은 10년 친구 얼굴조차 제대로 못 알아볼 정도로 눈썰미가 없습니다.
의사인 케이가 그만큼 위장을 잘 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주인공과 같이 있던 키요네는 위화감을 느끼는 바람에 
케이에게 살해당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죠.
진지하게 주인공은 탐정 폐업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케이는 주인공의 연인 미즈키를 예전부터 남몰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미즈키가 습격당하도록 내버려 뒀죠.
케이는 주인공같은 무능한 놈에게 미즈키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 같이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케이는 주인공을 죽여 시체를 숨기고 스스로에게는 전신화상을 입힙니다.
살아 남은 주인공인 척해서 미즈키와 살아간다는 엔딩입니다.
미즈키에 대한 애정만큼은 진짜인 것 같군요.

반전 자체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해피엔딩을 플레이할 때, 불에 타 죽은 범인을 보고 
좀 더 정교한 계획을 예상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 반전이었죠.
하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해피엔딩보다는 반전이라도 있는 이 엔딩이 훨씬 낫네요.



총평하자면, 당대에 탐정을 소재로 한 에로게는 많았고
그만큼 쓰레기같은 내용의 탐정물이 많던 시대였지만,
그 쓰레기 중에서도 하위권일 정도로 아쉬운 점이 많이 보였던 게임입니다.

H씬은 시대를 고려하면 과격하고 과감했습니다. 
추리, 스릴러 요소를 포기하고 오로지 ㄴㅇ만을 감상하고 싶은 분들께는
쓸만한 게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단 한 번도 범인을 못 막는 무능한 주인공이 
감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