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2021년, 에로게의 레전드 중 하나인 <동급생>이
FANZA GAMES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저는 동급생에 대해
'천 년 후에 우리나라 미연시 역사책이 쓰여진다면
그 첫 페이지에 적힐 작품'이라고 소개한 바 있고,
그에 걸맞게 이번 리메이크는 에로게로서는 이례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동급생 리메이크에 대해 살펴 보기 전에
먼저 동급생의 발매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예전에 적었던 리뷰에서 그나마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급생은 PC-98기종으로 92년도에 처음 발매되었습니다.
당대 에로게 수준을 가뿐히 뛰어 넘은 동급생의 퀄리티는
엘프 사를 에로게 회사 중에서도 독보적인 톱까지 끌어올린 1등 공신이었습니다.
이 DOS 버전은 한국어판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되기도 했죠.
이후, PC엔진, 세가 새턴 등에 이식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99년도에 발매된 '동급생 WINDOWS판'입니다.
동급생 WINDOWS판은 DOS판과 캐릭터와 기본적인 흐름만이 같을 뿐
스크립트와 선택지 등이 상당히 달라졌고
엔딩은 전혀 다른 장면으로 변경된 게임입니다.
이런 변화때문에 원작 팬들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죠.
저는 나름 괜찮았다고 평가했었습니다.
2007년도에는 '동급생 오리지날'이 발매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92년도의 스크립트 + 99년도의 CG'를 합쳐 놓은 게임이었죠.
추가 요소도 딱히 없었고, 보이스마저 없었기 때문에
성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임입니다.
저는 '동급생 오리지날'의 발매를
엘프 사에서 '동급생 WINDOWS판'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였습니다.
WINDOWS판이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면
오리지날이라는 이름으로 성의도 없는 게임이 발매되지는 않았겠죠.
그 후, 엘프 사는 망했고 엘프 사 게임의 판권들은
DMM GAMES(현 FANZA GAMES)로 이전되었습니다.
DMM은 엘프 사의 IP를 이용하여 다양한 웹게임을 발매했고,
그렇게 발매된 게임들은 퀄리티가 심히 좋지 않았습니다.
'드래곤나이트5 서비스 종료'때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DMM은 망해 버린 엘프 사를 능욕하고 있다고요.
동급생이 또다시 리메이크된다고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제 와서?'입니다.
92년판 기준으로 거의 30년이 다 되었으니까요.
제가 PC-98시절 게임들이 리메이크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과감한 변화입니다.
<ONLY YOU ~리쿨스~>, <진설 엽기의 함>, <진 유리색의 눈>같은 게임들은
캐릭터와 스토리의 큰 틀만 같은 뿐 어마어마한 변화를 주었죠.
저는 언제나 그런 게임들을 높이 평가했고요.
플로피 디스크 시절 게임은 어쩔 수 없이 볼륨 상의 한계가 있었고
내용이 어느 정도 축약될 수 밖에 없었죠.
그게 아니더라도 에로게의 초창기이자 격변기였던 90년대의 감성과
에로게 패턴이 어느 정도 안정된 21세기의 감성은 많이 달랐습니다.
90년대의 게임이 21세기에 먹히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는 게
제 오랜 지론입니다.
하지만, 2021년도에 발매되는 동급생 리메이크에는
원작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동급생은 이미 99년도에 변화를 시도했다가 비난을 받은 전례가 있었고
둘째로, 저에게 FANZA란 망한 엘프 사 게임들을
이상한 방식으로 능욕하며 우려먹는 장사치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이번 리메이크는 92년도 동급생을 그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99년도 동급생 WINDOWS판을 그대로 사용했죠.
있는 그대로의 리메이크가 된 건 예상대로였습니다.
리메이크에서 거의 변화를 주지 않은 이유로
'시나리오를 변경하면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상충 될 수 있다.'
'추가 캐릭터나 추가 장면이 원작에서 괴리될 우려가 있다.'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변화가 없을 거라고 이미 한참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저로서는
이 얘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굉장히 불만스러웠습니다.
동급생이 아무리 과거의 명작이었다지만
볼륨으로보나, 시나리오의 흐름으로 보나
지금 통용될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아니나다를까 일본에서는 얕은 시나리오, 빈약한 H씬 등이 크게 비판 받았습니다.
과거의 원작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플레이어를 존중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가격에 아무런 시나리오 추가도 없는 리메이크는 너무한 것 같아요.
그래픽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인데,
그렇게까지 혹평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원작하고 달라진 점은 많지만 최근의 에로게들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미사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DOS판이 가장 괜찮았던 것 같지만
다른 캐릭터의 경우는 개별적으로 따져 봤을 때
리메이크에서도 괜찮은 CG가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치하루의 스펙이라면 리메이크의 크기가 맞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제가 알던 치하루는 그걸 숨기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제가 이번 리메이크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시스템입니다.
원작의 시간 관리형, 장소 이동형 시뮬레이션은
요즘 게임 기준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시스템입니다만
동급생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대로의 시스템을 사용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걸 빼 버리거나, 난이도를 너무 쉽게 만든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거죠.
과연 리메이크는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플레이 첫 화면에서 UI를 살펴보면
큼직큼직한 버튼들이 눈에 띕니다.
태블릿이나 스마트폰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걸까요?
대화할 캐릭터가 앞에 있을 때,
오른쪽 아래에 생기는 말풍선 버튼과 돋보기 버튼은 주목할만 합니다.
돋보기 버튼을 선택하면 원작처럼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마우스 커서가 바뀌는 포인트 클릭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죠.
말풍선 버튼을 클릭하면 굳이 포인트를 클릭할 필요없이
그냥 앞에 서 있는 캐릭터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근데 말풍선 버튼을 사용하는 게
과연 입을 클릭하는 것보다 편리한지 의문이 듭니다.
입을 찾아서 클릭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이것도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염두에 둔 걸지도 모르겠군요.
입이 아닌 다른 포인트를 클릭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동으로 다른 포인트가 선택되도록 변경되었다면 좋았겠죠.
그럼 포인트 클릭에 신경쓰지 않고 단일 버튼으로 플레이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정작 그런 상황에서 말풍선 버튼으로는 게임이 진행이 안 되고
돋보기 버튼을 눌러서 다른 포인트를 선택해 줘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말풍선 버튼의 역할은 오로지 입을 클릭하는 걸 대체해 주는 것 뿐인데
'이지 모드'에서 추가된 힌트들을 살펴 봅시다.
이게 뭐가 편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두 사람이 앞에 있는 경우는 오히려 더 불편하기도 합니다.
말풍선 버튼을 선택한 후, 누구랑 대화할지를 또 골라야 하죠.
기존 시스템이면 대화하고 싶은 캐릭터의 입을 그냥 클릭만 하면 되는데
한 번 클릭할 일을 두 번으로 늘려 놨어요.
리메이크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클래식 모드'와 '이지 모드' 두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게임 시스템에 대한 딜레마를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클래식 모드'는 원작의 시스템과 큰 차이가 없어
원작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이브/로드 방식은 차이가 있는데
99년판에서는 일기장을 이용하여 주인공 방에서 세이브를 할 수밖에 없었죠.
또한, 일기장을 모아서 세이브 슬롯을 늘려나가야 했습니다.
반면에, 리메이크의 경우는 언제든지 세이브할 수 있고,
세이브 슬롯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 변화만으로도 플레이는 전보다 훨씬 쉽고 쾌적해지죠.
우선 이동할 장소에서 만나게 될 캐릭터를 미리 알려줍니다.
전체맵을 보더라도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죠.
21세기 게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시스템이며,
리메이크에서 가장 호평할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아쉬운 점은 남성 캐릭터의 경우는 맵에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자하고는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남성 캐릭터하고의 만남도 스토리 진행에 중요한 경우가 있어요.
게다가, 특정 장소에 '남성-여성' 순서로 등장하는 경우에도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집 앞에서의 만남 이벤트가
남성 캐릭터인 마타로 -> 여성 캐릭터인 미사, 쿠루미 순서라면
집 앞에는 아무런 표시도 뜨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 표시가 없는 곳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방문하면서 확인해야 하죠.
그 외에도, 사토미의 경우는 카페 '안'에 있기 때문에 맵에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아코의 경우는 약국에 가면 약국 '안'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표시가 뜨지만
사토미의 경우는 찻집에 가면 찻집 '앞'에 먼저 간 후,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표시가 안 뜨는 거죠.
딱히 찻집에서 사토미 이벤트가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지만
시스템적으로 뭔가 미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소와 시간대를 알려줄 뿐더러,
이벤트 등장 조건과 캐릭터의 현재 호감도까지 알려줍니다.
이것만 있으면 공략집을 따로 열어보지 않아도 플레이가 가능한 수준이에요.
게다가, 스케쥴표상에서 해당 이벤트를 클릭하면
아예 해당 이벤트의 시간과 장소로 점프가 가능합니다.
맵 이동따위 하나도 하지 않고
스케쥴표에서 간단하게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엔딩볼 수 있다는 거에요.
하지만, 이런 점핑 시스템을 사용하면
그 캐릭터의 엔딩에 반드시 필요한 주요 장면만을 보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냥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캐릭터와 잠깐잠깐씩 하는 잡담들은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특별한 CG도 없고, 큰 재미를 주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하고,
당시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를 가볍게 묘사하기도 하는
소소한 재미정도는 얻을 수 있는 이벤트죠.
점핑 시스템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이런 이벤트들은 전부 뛰어 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면 리메이크는
'동급생 다이제스트'나 '동급생 하이라이트'가 되는 거죠.
동급생이 후속작으로 이어지는 내용도 없는데 다이제스트로 플레이할 필요는 없고,
안 그래도 요즘 관점에서 빈약한 스토리를 하이라이트로 플레이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점핑 기능은 최소한 줄이시는 걸 권장합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면 호감도가 상승하는지도 표시해 줍니다.
원작 선택지도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편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이지 모드라지만 힌트를 너무 많이 주는 게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날지를 다 알려주는 셈입니다.
게임이 지나치게 쉽잖아요.
떠 먹여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뱃속에 부어 넣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로 많은 힌트를 원하시는 분도 있겠죠.
개개인의 취향을 맞춰주기 위해
난이도 옵션을 좀 더 세분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맵에 만날 캐릭터가 표시되는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할 기능이었고,
점핑이나 선택지 보조는 게임을 지나치게 쉽게 해주는 기능이죠.
이 모든 힌트들이 패키지가 되어
'힌트라곤 전혀 없는 클래식 모드'와
'힌트에 깔려 죽어 보라는 식의 이지 모드'로 나뉘어져 있어요.
너무 극단적인 모드 선택입니다.
점핑 기능이야 그냥 안 쓰면 그만이지만
선택지 보조 정도는 별도로 ON/OFF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일기장의 활용입니다.
99년판에서 일기장은 세이브 슬롯이었기 때문에 고생하며 모을 필요가 있었지만
리메이크에서는 세이브가 자유자재로 되기 때문에
일기장을 따로 모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일기장을 얻으면 축전 형식의 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급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KEY사의 히노우에 이타루나
엘프의 DOS 시절 스탭 아비루 토시히로, 타케이 마사키, 카도이 아야 등이 쓴
추억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꽤 괜찮았습니다.
게임이 발매되기 전에 제 기대가 적었던 이유도
동급생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추가 요소도 없는 리메이크가
저에게 재미를 줄 수 있겠냐하는 점이었죠.
하지만, 플레이해보니 제게 있어 동급생은 역시 동급생이었습니다.
나름 재미있게 플레이했어요.
특히 이타루의 일기장을 찾았을 때 큰 감정 변화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추억팔이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좋은 미연시를 찾는 분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90년대에 멈춰 있기 때문에
동급생에 대한 추억이 없는 분들께는
그냥 빈약한 스토리의 미연시로 느껴질 수밖에 없겠죠.
미연시 역사에 남을 초기 작품인 옛날 게임 동급생을
보다 편리하게 플레이하고 싶은 분께는 추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들께는 '있는 그대로 리메이크'라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죠.
제가 추천하는 플레이 방식은 처음에는 '클래식 모드'를 하거나
혹은 '플래그 스케쥴'을 보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 위주로 플레이한 후,
남은 캐릭터들은 점핑 모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엔딩을 보는 방식입니다.
이게 리메이크를 가장 유용하게 플레이하는 법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