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일요일

리뷰 : REVIVE... ~소생~(1999/10/28,데이터 이스트)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REVIVE... ~소생~>은 1999년에 드림캐스트용으로 발매되었습니다.
<통곡 그리고...>의 후속작으로서 
시스템은 큰 틀에서 그대로 계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흡사하지만
스토리상으로는 연관성이 거의 없는 게임이죠.

높은 난이도로 유명한 게임입니다.
이전에 <통곡 그리고...>를 리뷰할 때도 그 난이도가 높다고 불평했었지만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임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났어요.

높은 난이도에 고통 받았던 기억이 있는 게임은 바로 이 게임, 소생입니다.
이 게임도 기억이 거의 안 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뭐 플레이하다 보면 그 때의 기억과 고통이 소생할 수도 있겠죠.



이 게임은 2003년에 HARVEST에 의해 PC로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도 PC판이죠.

이 시기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드림캐스트 등 게임기로 먼저 발매되었던 
어드벤처류나 비주얼 노벨 게임들이 PC로 많이 이식되었죠.
그리고 그 중 상당수가 게임기와 PC의 차이를 조정하지 않고
무지성으로 이식되었습니다.

이 게임뿐만 아니라 <통곡 그리고...>도 <유작>에 비해서 시스템이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게임기와 PC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한 시스템도 있었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게임기에는 마우스가 없고, 제한된 게임패드 버튼으로 조작해야 하니
제작자들도 마음대로 안 되는 부분이 있었겠죠. 이해합니다.

이 게임도 드림캐스트판이라면 이해할 수 있어요.
근데 PC로 이식했잖아요. 그것도 4년이나 지나서요.
마우스도 생겼고, 키보드에 버튼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이걸 활용하지 않냐고요.

그냥 마우스로 포인트만 움직이게 했을 뿐,
'패드의 A버튼은 키보드의 Z키, B버튼은 X키' 이런 식으로
딱 에뮬레이터로 하는 수준으로 이식했습니다.
마우스 놓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할 정도로 불편합니다.

뭐, 이 시기에는 이런 방식으로 이식하는 경우가 많았죠.
요즘은 대부분의 게임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신경써서 이식합니다.
한참 옛날 게임에나 있었고 요즘은 해결된 문제를
굳이 욕해서 뭐하겠습니까.

<통곡 그리고...>에 비해 제가 짜증났던 결정적인 이유는
<통곡 그리고...>는 최근에 나온 리마스터가 있고,
이 게임은 리마스터가 없다는 점 때문이겠죠. 
자동 스킵과 편의성을 개선하여 새로운 리메이크 작품이 나온다면
이 게임에 대한 제 평가도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고등학생인 주인공은 부모님을 잃고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키하루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키하루는 '네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편지를 받고
주인공 몰래 동네에 있는 '해양진흥개발연구소'로 갑니다.

주인공의 소꿉친구 나오가 다급하게 와서 주인공에게 그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는 연구소가 폐쇄된 연구소도 아니고
연구소 이름으로 봤을 때 수상한 연구를 하는 곳도 아닌데
그렇게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동생이 말도 없이 가출했으니 찾으러는 가야겠죠.



나오와 함께 연구소 앞에 가보니 
연구소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옵니다.
핑계도 생겼겠다 주인공은 환기구를 뜯어 버리고 연구소로 잠입하죠.

연구소 안에서는 직원인 미스미가 셔터 아래에 끼어 있었습니다.
미스미를 구하기 위해 ID카드를 받아서 여러 방을 수색합니다.
다행히 차고 사물함에 잭이 있었고 그걸로 셔터를 올릴 수가 있죠.



잭을 찾아서 셔터로 가 보면 이미 빠져 나와 있는 미스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뒤로 빠져 나오면 됐네요'라고 합니다. 정말 재밌군요.

좀 멍청해 보이는 첫 인상이지만,
사실 조별과제하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다른 캐릭터는 연구소에 갇히든 말든 별 관심도 없어 보이죠.



연구소 제어장치가 맛이 갔는지 연구소에 갇혀 버린 주인공 일행입니다.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뿐만 아니라
많은 연구실들 문이 닫혀 있죠.

<유작>, <통곡 그리고...>와 마찬가지로 
그 문을 여는 건 주인공의 몫인데 이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폐쇄된 구교사가 무대인 <유작>,
아무도 안 사는 저택이 무대인 <통곡 그리고...>와 달리
이 게임은 직원들이 다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인데요?

ID카드가 안 맞고, 비밀번호가 바뀌는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건 직원들 몫이잖아요.
왜 직원들은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여기 처음 와 본 주인공이 조별과제 조장을 하는 건데요.



아무튼 여동생도 탈출구도 안 보이는 와중에 시체가 발견됩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죠.
그 후로의 흐름은 전작과 비슷하게 흘러가며,
방 탈출 게임을 하는 와중에 각 캐릭터들이 생명의 위기를 겪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전작과 달라진 점 중 하나로 '타임 리미트'가 있습니다.
전작에서는 심리적으로 사람을 급하게 만들었을 뿐 실질적인 시간 제한은 없었지만,
이 게임은 물리적으로 제한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생명의 위기에 처한 캐릭터를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시간제한도 빡빡하다 보니,
처음 플레이에서는 손도 못 써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전작만큼의 아쉬움을 느낄 수는 없네요.
좀 더 절묘하게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난이도를 맞췄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렵기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첫 번째 플레이에서도 모두를 구할 수는 있었던 전작에 비해
이 게임은 첫 번째 플레이에서 모두를 구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미흡하나마 힌트가 있었던 전작에 비해
이 게임의 치히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암호를 푸는 코드가 아예 없고 죽은 이후에나 힌트가 나와요.

하필 치히로의 사망장면이 특히 잔인하기 때문에
제작자의 고약한 심보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첫 플레이에서 전부 구하는 게 불가능하게 하려는 설계였겠지만
전작의 치밀한 설계에 비해 다소 직접적이었습니다.


캐릭터가 사망했을 때, 시체의 일부가 담긴 CG가 나옵니다.
그 장면을 텍스트로 묘사하는 것에 그쳤던 전작에 비해
이 게임은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죠.
그로테스크한 CG가 있는 건 아니고,
손만 보여 주는 정도의 소프트한 묘사지만 사람에 따라 불쾌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퍼즐은 전작에 비해 확실히 어려워 졌습니다.
필요한 아이템도 잘 안 보이고, 사용해야 하는 위치도 찾기 어려워졌죠.
사용하는 아이템에 관해서도 애매한 부분이 보이는데
누가 낚시바늘하고 목걸이 가지고 곰인형을 수리합니까?
저는 당연히 어딘가에 재봉도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 정도도 진짜 어려운 어드벤처 게임에 비하면 
최상위 난이도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고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다만, 행성 기호같은 건 난생 처음 봤고,
처음 본 사람을 위한 힌트가 부족했습니다.

화음 퍼즐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행성 기호에 비해 아는 사람이 많고,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퍼즐에서 한 번 막혀 버리면 
게임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터넷 공략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죠.



그 외에 에로적인 부분에서도 전작에 비해 퇴보했습니다.
전작이나 이 게임이나 에로게는 아니지만,
전작에서는 H씬만 없을 뿐 상당한 노출이 있었죠.
이 게임에서는 그런 요소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가슴 크고 요염한 레이코가 등장해서 사람들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생각보다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연구실 이동도 아쉬웠는데 지름길을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한 엘리베이터 이용을 계속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지름길로 할 만한 문이 뻔히 보이는데도 끝까지 열리지 않았죠.

<유작>과 마찬가지로 너무 넓어진 무대를 좁히기 위해 
닫히는 벽을 만들어 놓은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넓다고 생각하고 스토리상으로 무슨 이유인지도 잘 납득이 안 가지만
아무튼 무작정 난이도를 높이는 와중에 유일한 구원이었죠.



총평하자면, <통곡 그리고...>에 비해 큰 발전이 없었고
오히려 퇴보한 부분이 많이 보이는 게임이었습니다.
시스템은 전작에서 제가 짜증났던 부분이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스토리, 캐릭터 등은 전작이 더 괜찮았죠.
나아진 거라고는 오프닝 노래뿐입니다.

퍼즐에 관해서는 단순히 난이도만 높아진 건 아니고
나름 참신한 시도가 보였습니다.
작정하고 풀어 보시면 의외로 괜찮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 난이도면 아마도 인터넷 공략 보고 플레이하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군요.

한없는 인내심이 필요한 게임입니다.
딱히 추천하고 싶은 게임은 아니지만
관심있으신 분이라도 리메이크를 기다려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2021년 7월 18일 일요일

리뷰 : 통곡 그리고...(2)(1998/2/26,데이터 이스트)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통곡 그리고...>는 2018년도에 플레이스테이션 기종으로 리마스터가 나왔습니다.
2019년에는 닌텐도 스위치판도 나왔죠.

20년만의 리마스터답게 그래픽이 상당히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읽은 문장 자동 스킵 기능이 생겼습니다.
추가된 CG나 이벤트, 힌트 기능 등 다른 변경점도 있지만
자동 스킵만큼 훌륭한 변경점은 없는 것 같아요.
휴대용으로는 터치 스크린이 지원되는 것도 소소하게 마음에 드는 점입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부분인 난이도에 대해 살펴 봅시다.
사실, 방탈출 메인 스토리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이 정도도 힘들다고 느껴지면 이런 계열 게임을 하지 말아야죠.
잘 안 풀리면 오래 헤멜 수도 있지만 이 게임보다 어려운 게임은 넘쳐 납니다.
메인 난이도는 보통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각 캐릭터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저도 첫 플레이에서 노마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뭐 때문에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죽어 나가더라고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게임이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트릭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저택을 샅샅이 수색해야 하는데
초심자는 진도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헤메다가 열쇠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무슨 문제가 터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다짜고짜 열쇠부터 잡으러 가겠죠.

이츠미와 도망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체 모를 범인이 쫓아 오는 상황에서 
이츠미를 먼저 숨기고, 자신도 숨어야 하는데 
숨길 수 있는 장소는 한정이 되어 있고, 어디가 안전한지도 딱히 알 수가 없습니다.
딱히 시간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의 급한 심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의 느긋한 심리를 이용하는 부분도 있죠.



아틀리에 위쪽에 있는 비밀의 방에 갇히게 된 리요입니다.
이 방은 열쇠도 안 보이고 어떻게 구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
실제로도 갇히자 마자 구하는 방법따윈 없습니다.
스토리상으로 구할 수 있는 도구는 나중에서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지나칠 수밖에 없죠.

다시 저택을 수색하던 중, 
아틀리에 계단에서 유력 용의자1인 케이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깜짝 놀라서 비밀의 방으로 올라가 보면...



그냥 아무 일없이 멀쩡합니다. 리요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혼자 있기 심심할 텐데 퍼즐이라도 찾아서 갖다 주고 싶네요.
그 후에도 저택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잠깐잠깐 방문하는데 별 일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비밀의 방 문앞에서 유력 용의자2 타나베가 목격됩니다.
이번엔 혹시하고 긴장하며 방을 확인하지만
여전히 리요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합니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에게 느긋한 마음을 심어주는 겁니다.
사실은 타나베 등장 시점이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 후에는 강제 이벤트로 왔다갔다 해야 하고,
그 이벤트가 끝난 이후에 리요는 사망하게 되죠.



저를 대성통곡하게 했던 치사를 구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한 마음과 느긋한 마음을 잘 이용했죠.

'십자 드라이버'는 퍼즐을 풀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1번부터 15번까지 있는 숫자 패드에서 비밀번호 네 개를 눌러야 합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맞춰야 하죠.

문제는 비밀 번호를 알아낼 수 있는 힌트가 어디에도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죠.
왜냐면, 이런 스토리가 있는 방탈출 게임에서는 당장 힌트가 없더라도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힌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긋한 마음이 바로 함정이었던 거죠.


이 게임의 퍼즐은 철저하게 스토리 순서를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플레이한 기억이 있다든가 공략집을 보고 왔다든가 해서
비밀번호를 미리 알고 있더라도 소용없어요.
왜냐면, 주인공이 어딘가에서 힌트를 보고 오기 전에는 
숫자패드를 누르려고 시도조차 안 하기 때문이죠.
우연히 아무 번호나 눌러보니 맞았다는 스토리가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

예를 들어, 달력에서 날짜를 보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문이 있습니다.
달력을 게임 내에서 보기 전에는 플레이어가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이 번호를 누르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죠. 

역으로 말하면,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다는 건
이미 퍼즐을 풀 수 있는 힌트가 충분히 제공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미흡한 나머지 이게 힌트인지조차 눈치 못 채는 경우도 있지만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 어떻게든 비밀번호 네 자리를 유추할 수는 있다는 거죠.


첫 플레이에서 저는 이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사를 살리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 어떻게든 퍼즐을 풀어 볼 생각은 안 하고,
나중에 힌트가 나올 거라는 느긋하고 안일한 생각을 했던 거죠.

나중에 더 쉽고 직접적인 힌트가 나오긴 합니다. 치사가 사망한 이후에요.
그렇게 찾던 십자 드라이버가 뒤늦게 손에 쥐어지면 
다시 한 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첫 플레이에서는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2회차 플레이만 되어도 침착하게 행동하며 캐릭터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첫 플레이에서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죽어 나가는 걸 보고 
게임이 불합리하거나 난이도가 높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의도된 디자인이죠.

<유작> 리뷰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어느 정도 난이도를 높여서라도 1회차에는 사람들이 다 죽어나갈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타일로 한 명씩 서서히 사라지는 호러를 느낄 수도 있고,
다음 플레이에서는 반드시 구해 내겠다는 도전 의식도 생기는 거죠.

이 게임은 심리 트릭을 통해 난이도를 크게 높이지 않았으면서도
1회차 플레이의 긴장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건 불합리한 게 아니라 멋진 게임 디자인이죠.
이 게임의 불합리함은 따로 있는데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이 게임에서 또한 뛰어난 점은 다양한 패턴입니다.
여러 구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깨진 창문을 가릴 때는 거울을 사용할 수도 있고, 수건을 사용할 수도 있죠.
이벤트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방탈출하려는 플레이어의 창의성을 존중해서 
어떤 아이템이든 쓸 수 있게 해 준 배려입니다.



루트에 따라 또는 순서에 따라 다양한 이벤트가 전개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사망해야만 볼 수 있는 이벤트도 존재하죠.

이츠미의 경우는 치사가 사망하면 
주인공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함정을 파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주인공 앞에서 배 아픈 척을 하면서 주인공을 유인하려고 하는데,
주인공이 진짜 범인이었으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었을까요?
주인공이 도중에 알아 채고, '난 범인이 아니야'라고 항변해 보지만
이츠미는 그런 얘기는 안 믿는다고 하고 도망칩니다.



그 후에 이츠미를 다시 만나면,
이츠미가 범인에게 쫓기고 있다면서 주인공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인공이 범인이라고 따지던 캐릭터가
갑자기 도와달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런 다양한 루트가 있는 게임을 만들 때 어려운 점은
앞뒤 스토리에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건데
이 게임은 이런 부분에서 살짝 아쉬웠습니다.



탈출 직전의 선택지입니다.
탈출구를 열고 '남은 사람들을 부르러 간다'와 '혼자서 도망간다'는 선택지가 나오죠.

혼자서 도망가면 뭐 어쩌자는 거죠?
선택해 봐야 별 내용도 없어요. 죽기 싫으니 빨리 도망가겠다는 몇 문장 나오고 끝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여러분도 행복하세요~'같은 인삿말조차 없죠.
나중에 학교에서 리요나 마리에 선생 얼굴은 어떻게 보려고 이러는 걸까요?



이 게임은 엔딩이 많은 게임입니다.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배드 엔딩을 제외해도
각 캐릭터마다 황금엔딩, 노멀엔딩이 있고
특정 캐릭터 몇 명은 범인과 대결하는 엔딩까지 준비되어 있죠.



각 캐릭터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그 캐릭터의 개인 이벤트를 전부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에 황금 이벤트를 보면 황금엔딩, 그걸 보지 못한다면 노말엔딩이죠.

근데 이 개인 이벤트를 보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어디서 이벤트가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건 기본이고,
잠깐의 타이밍을 놓쳐도 이벤트를 영영 못 볼 수 있죠.
이벤트를 놓쳤다는 것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힘듭니다.


그 와중에 가장 저를 열받게 하는 건 바로 '엔딩의 우선순위'입니다.



마지막 엔딩 장면입니다.
탈출한 이후에 경찰과 같이 저택으로 현장 검증을 온 거죠.
저택 내의 방에 들어가면, 각 캐릭터들이 한 명씩 기다리고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치, 누구 엔딩을 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안 됩니다. 시스템상 엔딩에 우선 순위가 있어요.
예를 들어, 치사 황금엔딩 조건을 충족했더라도
코스즈 노멀 엔딩 조건도 같이 충족했다면 코스즈 노멀 엔딩을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치사 엔딩을 보는 방법은 우선 순위에 있는 다른 캐릭터 이벤트를 전부 피하고
치사 이벤트만 보는 거죠.



이 시스템이 얼마나 거지같은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릅니다.
동시 공략이 안 되기 때문에 각 캐릭터들의 엔딩을 다 보기 위해서는
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해야 돼요.
황금엔딩과 노말엔딩은 후반부 분기에 세이브를 통해 한꺼번에 볼 수 있지만
각 캐릭터들의 엔딩은 동시에 공략하려다가 한 쪽이 망해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식 공략 사이트에서조차 한 번에 한 명씩만 공략하는 걸 추천하고 있어요.

게다가, 각 캐릭터 개인 이벤트는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 이벤트를 찾기 위해서는 저택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녀야 합니다.
근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다른 캐릭터 엔딩 조건을 충족시켜 버릴 수도 있죠.
저택을 한없이 돌아다닐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한없이 돌아다니면 물먹는 함정까지 만들어 놓은 겁니다.

이건 정말 불합리한 시스템이에요.
제가 리뷰 도입부에서 읽은 문장 자동 스킵 기능을 그렇게 찬양한 이유를 아시겠죠?
수도 없이 다시 플레이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미친 난이도입니다.
공략집없이 모든 엔딩, 모든 CG를 모으는 건 불가능한 수준이에요.
비밀번호를 풀기 위해 00000에서 99999까지 전부 시도해 보는 정도로 도전해야 합니다.

심지어 주요 캐릭터 몇 명의 엔딩을 보지 않으면
이 게임의 진상을 전부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각 캐릭터들의 스토리마다 진상을 나눠 놓는 게임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난이도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별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보통 고생을 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리요나 코스즈같은 특별한 스토리라면 모를까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들은 동시공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야 돼요.



총평하자면, 방탈출정도만 즐기겠다고 생각하고 플레이하면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적절한 난이도의 게임입니다.
화사한 미소녀들, 무거운 저택의 분위기와 함께 양질의 방탈출 게임을 즐길 수 있죠.

제대로 파고 들겠다는 분들께는 무시무시한 난이도를 선사할 겁니다.
이 게임보다 더 어려운 난이도의 어드벤처 게임도 여럿 존재하지만
불합리한 시스템때문에 체감 난이도가 더 높게 느껴집니다.

리마스터판은 축복입니다.
어차피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국어판은 없는 게임이니
웬만하면 리마스터판으로 플레이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2021년 7월 11일 일요일

리뷰 : 통곡 그리고...(1)(1998/2/26,데이터 이스트)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통곡 그리고...>는 세가 새턴용으로 발매된 게임입니다.

원화가가 같고 게임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엘프 사 <유작>의 후속작 취급을 받고 있긴 하지만
<유작>과 달리 에로게가 아니기 때문에 H씬은 없습니다.
다만, 노출은 좀 있죠.

<유작>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최근에 리메이크가 발매되었지만, 
한국어판도 PC판도 발매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인지도가 낮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한참 옛날에 한 번 플레이해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는 게임입니다.
플레이 방법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탈출 계열 게임을 플레이하기에 정말 좋은 상태죠.

어렴풋이 떠오르는 제 기억으로는
<유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캐릭터들이 갑자기 위기를 맞이 했는데,
구하기도 하고 못 구하기도 했으며,
구하지 못한 캐릭터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 같습니다.

바닥에 다리가 끼었던 캐릭터도 있었는데 
그 캐릭터는 결국 구해주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머지는 전혀 기억 못하는 와중에 유독 기억이 나는 한 장면입니다.



게임은 주인공과 클래스메이트인 리요의 하교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사는 동네는 최근에 두 사람이나 행방불명되었던 흉흉한 동네입니다.
안전한 버스에 타고 있긴 하지만 늦은 밤 하교길의 분위기가 정말 으스스하게 느껴집니다.



정류장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과 함께 웬 노인이 버스에 타게 됩니다.
선생님은 피곤한지 주인공이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노인은 빈자리 다 놔두고 선생님 바로 옆자리에 딱 붙어 앉습니다.



그러던 중 주인공이 탄 버스와 마주 오던 자동차의 추돌사고가 일어납니다.
주인공은 리요를 감싸려다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게 되죠.

하필 추돌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깊은 산 속을 통과하는 도로였으며,
시대가 시대인지라 아무도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갑작스레 조난당한 사람들 눈에는 산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외딴 저택이 들어옵니다.

정신을 잃은 주인공이 걱정되기도 하니, 외딴 저택에 신세를 지기로 합니다.
그러나 저택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옥이었습니다.
일단 버스 운전기사가 혼자서 도움을 부르기 위해 걸어 가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택에서 쉬기로 합니다.



주인공이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제대로 된 게임이 시작됩니다.
조명도 밝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 방문까지 잠궈놨군요.

방의 구석구석을 클릭하며 탈출에 필요한 도구를 찾아 사용하며, 퍼즐을 푸는 방식입니다.
<유작>과 마찬가지로 방탈출 게임이죠.
튜토리얼도 겸하고 있는 첫 방인만큼 그다지 어렵지 않게 탈출할 수 있습니다.



첫 방을 탈출한 이후에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각 방들을 살펴 보고 같이 조난당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위에 있는 CG의 장소가 기억이 납니다.
저기서 누군가가 발이 끼어 죽을 위기를 맞이 했죠.
방을 잘 관찰하니 나사로 잠겨있는 콘센트와 끊어진 휴즈가 보입니다.
어딘가에서 '십자 드라이버'와 '휴즈'를 찾아 와야 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아무튼 이렇게 저택을 돌아다니는 와중에 사태가 심각해지는데,
누군가가 저택 곳곳의 문과 대문까지 잠궈 버려서 탈출은 불가능해졌으며,
로커 안에서는 행방불명되었던 집배원이 시체로 발견된 겁니다.
범인이 무슨 생각으로 문을 잠궜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시체까지 발견되었으니 장난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죠.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등장인물들을 살펴 봅시다.


주인공의 소꿉친구이자 클래스메이트인 리요입니다.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이런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을 지탱해 주는 치유계 캐릭터죠. 
스포일러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그렇게 할 말이 많지 않은데
중간에 독방에 한참 동안 갇혀 있기 때문에 활약이 많이 줄어들은 탓도 있죠.

캐릭터별 해피엔딩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이 게임 중에서도
저를 정말 많이 골치 아프게 했던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주인공네 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마리에 선생입니다.
전작의 쿠미 선생과 비슷한 느낌인데,
도움은 쥐뿔도 안 되면서 혼자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버스에 같이 탔던 영감에게 뭔가 협박을 받고 있는지
이 위기 상황에서도 야한 짓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브 캐릭터들의 스토리가 비교적 약한 게임이지만
마리에 선생이 대체 무슨 협박을 당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플레이어를 꽤 궁금하게 만듭니다.
마리에 선생 개인 루트에서 진실이 밝혀지는데
너무나도 별 볼일 없는 결말이라 허무했습니다.



상대 차에 타고 있던 이츠미와 치사라고 합니다.
근처 동네에 여행왔다가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탔는데
하필 그 차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말려들게 된 캐릭터들이죠.

왼쪽의 이츠미는 밝고 활발한 성격입니다.
주인공을 좋게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치사가 먼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주인공을 의심해서 함정을 파기도 하죠.
함정이 참 허술합니다.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오른쪽의 치사는 점잖고 얌전한 성격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뛰어난 궁도 선수로 신문에도 나올 정도죠.
갈색 롱헤어의 정통파 히로인으로 첫인상은 가장 제 마음에 듭니다.
엄밀히 말하면 옛날에 플레이한 적이 있기 때문에 첫인상은 아니지만
아마 옛날에 플레이했을 때도 치사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거에요.



수상한 노인 칸다가와입니다.
마리에는 틀림없이 칸다가와에게 협박당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여성들이 칸다가와에게 희롱을 당하게 됩니다.

명백하게 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이 노인은 범인이 아닐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이런 장르에서 범인은 대부분 이렇게까지 대놓고 분탕을 치지 않기 때문이죠.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해 버리면 아무 범죄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범인이라면 좀 더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을 겁니다.



초반 시점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케이입니다.
외관만 봐도 범인이 어울리는 안경 낀 미형 남성이죠.

거기에 이런 장르에서 중요한 법칙 중에 하나로 '판 깐 놈의 법칙'이라고 있습니다.
지금 이 판을 누가 깔았느냐,
다시 말해 이런 상황이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법칙이죠.

케이는 버스와 충돌한 자동차를 운전했던 장본인입니다.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저택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승객들이 교통사고가 일어나도록 조작하기는 힘들죠.
버스 기사 혹은 케이가 범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버스 기사는 이 장소에 없기도 합니다만,
승객을 선택하기도 힘들고, 앞에서 다른 차가 올 것도 예측하기 힘이 듭니다.
반면에 케이는 히치하이킹으로 두 명을 태운 상태이며,
버스가 오는 시간대도 쉽게 알 수 있죠.
여러 모로 가장 범인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주인공의 활약으로 저택 내의 잠겨 있는 문을 열게 되면
세 명의 캐릭터가 추가됩니다.



버스 승객이었던 노마와 코스즈입니다.

왼쪽의 노마는 부잣집 아가씨인데 괜히 가출해서 버스를 탔다가 사고가 나고 말았죠.
철없는 말괄량이 아가씨 느낌이기는 한데
주인공 앞에서 부자라는 걸 그다지 과시하지도 않고
사투리를 너무 심하게 써서 부잣집 아가씨라는 느낌은 그다지 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의 코스즈는 노마 집에서 고용되어 있는 메이드입니다.
원래 복장은 메이드복이 아니었지만, 
실수로 선반에 있던 액체가 쏟아지면서 입고 있던 옷이 더럽혀졌죠.
마침 이 폐옥에 남아 있던 옷은 메이드복 밖에 없었는데
그게 딱 애초에 메이드였던 코스즈에게 잘 어울렸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전개지만 이건 인정해 줘야 합니다.
이토록 멋진 저택을 무대로 만든 게임인데
여기에 메이드 하나 등장시키지 않는다면 
이건 게임 제작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니겠습니까?
무슨 억지를 써서라도 메이드가 등장할 필요가 있었죠.
스토리상으로도 숨겨진 의미가 있고요.



마지막 캐릭터는 타나베입니다.
처음 타나베를 봤을 때는 이걸로 케이가 범인 확정이라고 생각했죠.
범인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주기에는 외관이 영 아니잖아요.

하지만, 뜻밖에도 수상한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어떤 캐릭터를 구해줬을 때는 뒤늦게 나타나서 '쳇'이라면서 혀를 차는 모습까지 보여줬죠.
생각해 보면, 외관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범인 후보2에 올려 놓도록 하죠.



캐릭터는 꽤 매력적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만
캐릭터를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방에 들어 갔을 때나, 이벤트가 일어났을 때의 대사 이외에는
따로 캐릭터들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말한다'라는 커맨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죠.

평범한 대화까지 만들기에는 제작비가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그런 대화가 게임의 분위기를 해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캐릭터들과 접촉할 기회가 좀 더 많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 안 되는 접촉 기회에도 캐릭터들은 매력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정통파 미소녀 치사가 게임 도중에 리본을 선물받아 
포니테일로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이벤트가 있는데
주인공에게 칭찬받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이런 흉흉한 저택 속에서 탈출 한 번해 보겠다고 
각 방을 몇 번씩이나 돌아다니며 개고생하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이벤트죠.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피어납니다.



그 직후에 지하실 세차장 바닥에 발이 끼어 버린 치사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죠.
아니, 여기서 사망하는 제 기억 속의 캐릭터가 치사였나요?

치사는 주인공에게 열쇠를 찾아냈다면서 건네 줍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주인공에게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와중에
한 몸 희생하며 열쇠를 찾아 주는 치사의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포니테일 치사는 등장하자마자 이대로 퇴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첫 번째 희생자로요.

구하는 방법은 대충 짐작이 갑니다.
바닥에 있는 창살을 육각형 전동 드라이버로 풀어 버리는 거죠.
마침 전동 드라이버는 갖고 있습니다.

근데, 전기가 없어요.
아까 말했듯이 콘센트는 막혀 있고, 휴즈는 끊겨 있습니다.
'십자 드라이버'와 '휴즈'가 있어야 하는데
저택을 내내 돌아다니는 동안 그 두 아이템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전동 드라이버가 있는데 왜 구하질 못하니...'의 상황인 거죠.

마지막 희망은 치사가 건네 준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서 '십자 드라이버'와 '휴즈'를 가져 와야 하는 거죠.
잠겨 있는 방이 아직 많은데 이곳 저곳 시험을 하다 보면,
치사가 준 열쇠는 엘리베이터 열쇠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치사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빨리 드라이버와 휴즈를 찾아서 돌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급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버립니다.
엘리베이터를 고치기 전에는 1층으로 돌아갈 수가 없죠. 함정에 걸린 겁니다.


치사의 이벤트야말로 이 게임의 책략이 총 집결되어 있는
트릭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니테일이야 제 개인적인 취향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주인공의 말 한 마디에 얼굴을 붉히는 정통파 미소녀 치사의 위기에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직접적인 아이템인 전동 드라이버까지 플레이어의 손에 쥐어 줬으며,
구하는 방법도 간단하고 무슨 아이템이 더 있어야 하는지까지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해당 아이템을 찾지 못했을 뿐이죠.
게다가 초보자는 게임 진행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저택을 샅샅이 수색하기 마련인데 그동안 그 아이템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플레이어에게 마치 한 줄기 동아줄을 내려 주듯이 엘리베이터 열쇠를 건네 줍니다.
누구라도 눈 뒤집혀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는 설계죠.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붙잡았던 그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던 겁니다.



2층에서 한참을 헤메다 1층으로 귀환한 후,
지하실 세차장 문 앞에 가면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저는 희생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걸로 기억했는데
지금 보니 CG만 없을 뿐 텍스트로 적나라한 시체 묘사가 있었습니다.
기억의 착오였던 모양입니다.

참담한 심정입니다.
제가 옛날만큼 포니테일을 좋아하지 않고,
멘탈이 많이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망정이지
옛날에 플레이할 때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말 그대로 통곡을 했을 겁니다. 리뷰 한 주 쉬었어야 돼요.



슬픔을 뒤로 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저는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불행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하게 저택을 수색했습니다.
하지만, '십자 드라이버'와 '휴즈'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과연 저는 무엇을 실수했던 걸까요?
그 진상은 리마스터판과 함께 하는 다음 리뷰에서 밝혀지게 됩니다.

2021년 7월 4일 일요일

리뷰 : 하급생2(3)(2004/8/27,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소꿉친구인 사이몬 타마키입니다.
주인공이 몸 담고 있는 킥복싱 동호회의 매니저이기도 하며,
근처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죠.

전작과 마찬가지로 하급생2에서는 각 캐릭터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주소', '생일', '남자친구의 유무'죠.
주소나 생일이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이지만 
타마키에게도 형식적으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마키는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남자친구의 유무'에 '있다'라는 대답을 하는 캐릭터입니다.
이미 의대생 남자친구가 있어요.
소꿉친구인데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겁니다.

어디서 전학생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소꿉친구 캐릭터라면 당연히 게임의 1선발을 맡던 시절,
비처녀 소꿉친구 캐릭터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캐릭터와 데이트 도중에 타마키의 데이트를 목격하는 이벤트도 있습니다.
비슷한 이벤트가 전작의 시즈카나 미나츠에게도 있었으나
하급생2는 한발짝 더 나아가 키스나 애무를 하는 장면까지 있죠.



타마키 공략의 시작은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소꿉친구의 친분 때문인지 극초반에 데이트 신청을 성공할 수 있는 캐릭터죠.

게임 시작 첫 주에는 데이트 신청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데
주인공이 '타마키는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라고 생각하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둘째 주에도 데이트를 신청하면 
주인공이 알았다고 하고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주인공은 플레이어의 조종을 받는다고 치고
애인이 이미 있는 타마키는 왜 데이트 신청을 쉽게 받아 주는 걸까요?
이유는 타마키가 주인공과의 관계를 남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마키는 주인공 볼에 붙은 밥풀을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 먹고,
오락실 데이트에서는 주인공이 당황할 정도로 가슴이 밀착되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전작의 미코와 비슷한 느낌인데 좀 더 강하게 표현한 겁니다.
주인공과 데이트한다는 건 타마키에게 그냥 친구랑 놀러간다는 것일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는 거죠.

타마키가 주인공에게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애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타마키는 떳떳하다거나 떳떳하지 못하다거나의 문제도 아니고
아예 문제가 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는 거죠.



아직 초반부이지만, 이 때부터 거부감을 느낀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주인공이 타마키에게 뭔가 애틋한 감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타마키 역시 주인공에게 별 감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생 애인의 눈치따위는 보지 않고 계속 데이트를 하는 거죠.
플레이어가 보기에는 참 생각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굳이 성사되지 않을 둘의 데이트가 계속 되는 이유는 뭘까요?
주인공 때문도 아니고, 타마키 때문도 아니며
바로 플레이어가 마우스로 직접 하는 데이트 신청 선택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플레이어가 직접 해야 하니
이런 설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분들도 계셨죠.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아무 문제 없이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애인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애인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타마키가 한 소리 들은 것 같습니다.

타마키도 눈치가 보였는지 주인공에게 놀러가는 걸 좀 삼가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후에는 데이트 신청을 하면 거절을 당하죠.
약 3주동안 데이트 신청을 안 받아 주지만
그 후에는 다시 '에라 모르겠다'식으로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이 이벤트는 타마키의 호감도가 60정도 되면 발생하는데
이쯤에서는 타마키도 주인공을 남자로서 많이 의식하기 시작한 시점일 겁니다.
이전까지는 타마키 스스로가 뭐가 문제인지 못 느꼈다고 옹호해 줄 여지도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양쪽에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캐릭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부분을 어장관리라고 생각하고 불쾌하게 느낀 플레이어도 많았죠.



가을 쯤이 되면 데이트가 펑크난 타마키가 우연히 지나가던 주인공과 대신 논다든가,
주인공과의 데이트가 끝나면 애인이 나타나 차에 태워서 어디로 간다든가,
타마키가 공원에서 고민한다든가 하는 이벤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마키와 애인의 관계가 삐그덕거리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거죠.
타마키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 속에서도 계속 타마키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야 합니다.
당연히 플레이어의 손으로요.

애초에 주인공이 타마키에 대해 남몰래 연심을 품고 있었다면
그래서 어떻게든 타마키를 빼앗으려는 마음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조차도 없이 무의미한 데이트만 계속 신청해야 하니
소꿉친구의 연인관계를 그냥 파탄내는 스토리가 되어 버렸죠.

그런 데이트 중에 또다시 의대생 애인이 차를 타고 나타나 타마키를 픽업해 갑니다.
척보기에도 그다지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차는 러브호텔을 향하죠.
타마키가 걱정되기 때문에 주인공도 러브호텔로 갑니다. 플레이어가 조작해서요.

러브호텔 앞에서는 타마키가 애인과 싸우고 있죠.
애인은 마침 도착한 주인공을 보더니,
타마키도 이미 헤어질 생각으로 주인공을 부른 거 아니냐고 야유를 하며
타마키와 의대생 애인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타마키는 실연의 충격으로 주인공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주지 않습니다.
집에 찾아가도 만날 수 없으며, 학교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10번을 조우해야 
타마키가 충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이브/로드를 통해 하루 만에 타마키를 10번 만나면
단 일주일만에 실연의 아픔에서 회복하는 타마키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 후에는 평범한 하급생 시리즈의 스토리로
주인공과 타마키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는 스토리입니다.
다만, H씬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명대사가 여럿 있었죠.
'미안해, 처음이 아니라서...'
'하지만, 알아 줬으면 좋겠어. 나, 정말로 그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같은 것들 말이죠.



여기까지가 이제는 전설이 된 사이몬 타마키의 스토리입니다.


스토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는 미루고
일단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메인 히로인이 비처녀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난리가 났죠.

일본 사이트에서 이 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중고니 빗ㅊ니 도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신랄했는데
방금 말했듯이 어장관리라는 건 플레이한 사람도 그렇게 느낀 사람이 있었던만큼
관점의 차이지 악성루머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악성루머는 더 심하게도 임신이라든가, 낙태라든가 하는 
있지도 않은 사실무근의 얘기들이었죠.
정말로 엄청 났습니다.

타마키는 원래 주인공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기억상실에 걸린 틈을 타서 주인공이 빼앗았다는 루머도 있었죠.
팬디스크에서 기억상실이 나오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스토리입니다.
또한, 주인공과의 H씬 와중에 전남친의 이름을 계속 외친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이 역시 사실무근입니다.
다만, H씬에서는 전남친과 비교한다는 느낌을 주는 대사도 있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떡밥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죠.



엘프 사는 타마키를 대체 왜 비처녀로 설정했을까요?
이 정도 논란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엘프 사의 최고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 세계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한 소녀 YU-NO>에서는
비처녀 캐릭터가 일곱 캐릭터 중에 무려 다섯 명입니다.
칸나의 뒷사정의 경우는 특히 더 과격했죠.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때의 기억들을 갖고 있던 엘프 사에서는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하급생2에서는 등장하는 아홉 캐릭터 중 다섯 명이 비처녀 캐릭터입니다.
타마키, 후미, 미사키, 카즈키, 미카죠.
스토리나 캐릭터로 봤을 때, 후미나 미카면 모를까
미사키나 카즈키까지 비처녀 캐릭터라는 점에서
엘프 사가 이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가 금기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겠죠.

더군다나 후미와의 첫 H씬에서는
처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주인공에게 후미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고 대답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만큼 별 생각이 없었다는 거죠.


하지만, 에로게 전반의 경향으로 봤을 때
90년대면 모를까 2000년대에는 이미 대부분의 에로게 회사가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엘프 사가 눈치가 없었을 뿐이에요. 소비자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에로게에 한정해서 하급생2는 비처녀 논란의 시작도 아니고 절정도 아닙니다.
마침표에요.
이 이후에는 그 어떤 게임도 감히 이 금기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에로게의 캐릭터는 나이에 관계없이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무조건 처녀입니다.
H씬이 없는, 예를 들어 선생님같은 비공략 캐릭터들은 게임 중에
'아직 키스도 해 본 적 없어'라는 대사가 삽입되어 있죠.

처녀빗ㅊ같은 캐릭터도 에로게에서는 일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미망인인데도 H 이전에 남편이 죽어서 처녀,
애 딸린 유부녀인데도 시험관 아기라서 처녀,
처녀가 아닌데도 과거로 돌아가서 처녀,
이 놈의 바리에이션은 끝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경향을 하급생2가 만들어 낸 건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고, 
하급생2는 금기를 건드린 게임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였을 뿐이죠.

사실 처녀에 관한 논쟁은 요즘은 많이 수그러 들었습니다.
과몰입과 분탕 등 비슷한 논란이 계속되면서 
이제는 이런 걸 굳이 따지는 사람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많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다만, 에로게 업계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아무도 범할 수 없는 금기입니다.



처녀 논란의 시대가 지나고 
하급생2에 대해 많이 제기되었던 문제는 역시 NTR 스토리입니다.
사실 진작에 이게 문제가 되었더라면 이해가 되는데
이 문제는 싹 사라지고 처녀 논란만 실컷 터졌던 분위기가 비정상적이었죠.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순애물을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꽤 불쾌할 수 있는 설계였습니다.
비주얼 노벨이 아니라 하급생2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주인공의 행동을 조작한다는 점에서 몰입감을 높여줄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역으로 그게 더 큰 문제로 작용했습니다.
데이트 신청에서 러브호텔로 가는 조작까지
찝찝한 작업을 플레이어가 직접 해야 하죠.

타마키의 테마는 아무 감정없는 친구에서 연인으로의 변화였으나
그 과정이 일반 미연시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러나 과감한 소재에 비해 스토리나 캐릭터도 아쉬웠죠.
심도있는 내용이나 섬세한 감정 묘사를 거의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은 주인공과 타마키의 행동에 공감하지 못했고
게임에 많은 불평을 토했습니다.



전에 밝혔듯이 저는 NTR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 평가로 타마키의 스토리가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습니다.
논란을 보고 오히려 '성인 게임에서 이 정도도 못할 정도인가.'라고 생각했죠.
제 기준에서는 밋밋하고 온건한 스토리였습니다.

발매 당시의 플레이했던 사람들의 분노라면 수긍할 수 있습니다.
발매 전에는 정보가 없었고 이런 스토리가 될 거라고 예측하기 힘들었으니까요.
근데 뭔 게임인지 다 알고 있는 지금 플레이한 사람들의 시점에서
충격적인 스토리라기에는 좀 약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급생2보다 1년 전에 발매된 E.G.O.의 <우리 여동생의 경우>만 봐도
훨씬 과격하고 충격적이었죠.


제가 아쉬워하는 건 이런 점입니다. 에로게가 너무 조심스러워졌어요.
예전에 제가 기대했던 에로게의 모습은
다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묘한 스토리, 과감한 캐릭터 설정, 복잡한 인간관계 등의 요소를 갖춘
어른들의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20년간 나왔던 게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성인 요소들을 많이 넣었다는 게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H씬만 나온다든가,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음담패설로 점철되어 있다든가,
단순히 CG가 잔인하고 선혈이 낭자한다든가 할 뿐이었죠.

대부분의 게임들은 그냥 소년 액션 만화나 러브코미디에
H씬이 추가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게임들 중에서도 많은 게임을 사랑하지만
모든 에로게가 그렇게 될 필요는 없잖아요.

충격적이고, 씁쓸하고, 찝찝하고, 괴로운 게임이면 어떻습니까?
처녀 아닌 캐릭터 나오면 어떻고, NTR 엔딩도 약간 있는 순애물 나오면 어떻습니까?


<바하무트 라군>같은 일반 게임도 아니고
성인 게임에서 이 정도도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다양성은 훼손되고 양산형 에로게만이 업계를 지배해 버렸어요.

뭐, 이게 취향인 분들이 많기 때문에 에로게도 이런 방향으로 갔을 것이고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생각했던 미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하급생2가 이런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줬던 게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미래를 상징하는 게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빨리 눈치채고 에로게에서 손을 털었어야 했죠.
물론, 하급생2를 플레이할 때는 몰랐고 이제 와서 생각하면 말이지만요.



제 에로게 인생을 총평하자면, 망했습니다. 
빨리 다른 길을 찾아 봤어야 했죠. 이젠 뭐 오도가도 못합니다.

하급생2만 잘 되었더라면 엘프 사의 미래도, 에로게의 미래도
어느 정도 제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급생2, 제 인생의 중요한 IF와도 같은 게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