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2일 일요일

리뷰 : 리프레인 블루(1999/11/26,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99년도에 엘프에서 발매한 <리프레인 블루>입니다.
당시 점점 대세가 되었던 비주얼 노벨 형식으로 만들어진 게임이죠.
리프 비주얼 노벨 시리즈를 의식했는지
'엘프 노벨 시리즈 제1탄'같은 수식어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민망하게도 2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7년 전, 해변에서 미카게라는 여성을 만나 며칠간 사랑을 하였으나
슬픈 이별을 겪게 되었습니다.
7년이 지나, 주인공은 서머스쿨의 안내원이 되어 다시 그 해변을 찾게 되고
미카게와의 추억을 되살리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이 시절은 이후 시기에 비해 노스탤지어 감성에 호소하는 
에로게가 많이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리프레인 블루도 마찬가지인데,
지금의 게이머들에게는 약간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개그 요소가 절제되어 있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캐릭터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침착하고 얌전한 캐릭터인 시즈쿠나 유오리는 그렇다 치고
비교적 활발한 캐릭터인 나오, 치나츠, 츠구미 모두
게임의 축 처진 분위기를 띄우기는 역부족이었다고 봅니다.

비판할 점은 아닙니다. 
취향의 문제기도 하고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기에는 이런 분위기의 게임이 꽤 나왔습니다.



여름을 표현하는 방식은 괜찮았습니다.
화면 효과를 이용해서 아스팔트의 뜨거움을 잘 표현했고,
여름의 산이나 바다 등을 잘 표현했죠.

게임을 하면서도 이게 게임 내에서 나는 매미소리인지,
저희 집 창문 밖에서 나는 매미소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마치 여름을 제 방구석 안으로 그대로 옮겨 온 것같은 현장감이 있었죠.
그래서 더 더웠습니다. 하필 이걸 여름에 플레이하는 바람에...



캐릭터별 스토리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결코 나쁜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크게 뛰어난 점도 없었죠.
마음의 상처나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캐릭터를 도와준다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점도 좋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게임에 대해 지루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확실히 지루함을 덜어줄 무언가가 부족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게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해진 공략 순서'입니다.
반드시 '나오/치나츠' -> '츠구미' -> '시즈쿠/유오리' -> '미카게' 순서로 
플레이하도록 설계되어 있죠.

강제로 공략 순서가 결정되는 건 여러 게임에서 많이 사용된 방법입니다.
중요한 복선이나 충격적인 반전을 잘 활용한다면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죠.



이 게임의 문제는 그런 공략 순서에 과연 의미가 있나 하는 점입니다.
추억 회상씬을 제외하면 각 캐릭터들의 스토리는 
거의 연관성이 없고 별도로 진행이 되기 때문이죠.

츠구미 스토리를 왜 나오/치나츠 스토리보다 나중에 봐야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시즈쿠, 유오리 스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하게 순서를 정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진엔딩인 미카게 스토리뿐입니다.



근데, 사실 스토리상 별 이유없이 공략 순서를 정해둔 게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가장 매력을 느낄만한 캐릭터의 공략을
가장 마지막에 하도록 분배를 해 놓는 방식이죠.

이 게임에서는 그마저도 아닙니다.
처음 플레이 가능한 '나오/치나츠' 루트에서 
츠구미나 시즈쿠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어요.
왜냐면 그 둘은 제대로 등장조차하지 않으니까요.

여러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특정한 캐릭터를 공략하는 도중에도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나
다른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는 복선을 깔아 놓습니다.
그렇지 못한 게임들도 최소한 초반부에 다양한 캐릭터를 투입시켜
자기 소개라도 하게 만듭니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플레이어가 게임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게 되며,
다시 한 번 플레이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겁니다.

근데 이 게임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에요.
치나츠의 스토리를 본다고 했을 때, 다른 캐릭터의 매력을 느낄 수 있기는커녕
다른 캐릭터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방법입니다.
대사 한 마디 없고, 그냥 보면 지나칠 수 있는 배경에만 등장할 뿐이죠.
이게 무슨 월리를 찾아라인가요?
처음 플레이하는, 저게 누군지도 모를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의미없는 공략 순서를 강제로 정해둔 것만큼이나 문제점은
그 순서를 따라 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지 못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즈쿠같은 미스테리한 스타일의 캐릭터가 좀 더 초반에 등장해서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자극했어야죠.



플레이어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는
모두 최종장의 미카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려진 미카게와 비슷하게 생긴 수수께끼의 소녀가 계속 나타나기도 하고,
미카게와의 추억 이야기가 다른 캐릭터들의 스토리 사이사이에 나타나서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된 진실을 밝혀주기도 합니다.



다섯 명의 캐릭터 스토리에서 볼 수 있는 각각의 추억들이 서로 모순되기도 합니다.
특히, 최종장까지 가면 지금까지의 전제 자체가 뒤바뀐 듯한 장면이 있는데 상당히 흥미진진해요.
마지막 부분도 나름 감동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최종장의 미카게의 스토리만큼은 좋았습니다.

다만, 그 미카게의 스토리를 보기 위한 강제 공략 과정이 너무 길었어요.
지루하다기 보다는 장황했습니다.
복선을 깔기 위해 다른 스토리도 필요했고,
미카게의 스토리가 가장 마지막에 오는 것도 맞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나머지 다섯 캐릭터의 스토리가 좀 더 좋았거나,
아니면 개그나 캐릭터가 좋아서 템포 좋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면
더 괜찮은 평가를 내렸을 겁니다.

서태웅도 아니고 후반을 위해 전반을 너무 버렸네요.
비슷한 경험으로 <Ever17>을 플레이할 때가 생각나는데
초중반부까지만 해도 명성에 비해서 지루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엔딩은 그동안의 평가를 뒤집고도 남았죠.
리프레인 블루의 마지막은 전반의 평가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총평하자면, 그래픽, 성우, 효과, 스토리 등이 전반적으로 좋았던 게임이지만
특출난 부분은 없었던 게임입니다.
사실 시대를 고려하면,
다양한 부분에서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것 자체가 특출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에로게는 보이스가 없는 게임이 대부분이었고
그래픽이 들쭉날쭉한 게임도 많았으며, 스토리는 만들다 말았던 게임도 많았죠.
지금과 달리 모든 면에서 좋은 게임이 드물었던 시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반적으로 좋았던 게임보다는 강력한 한 방에 더 점수를 주는 편입니다.
CG가 참담하더라도, 보이스가 아예 없더라도,
여운이 몇날 며칠을 가도 잊혀지지 않는 스토리가 있다면 
그런 게임에 더 높은 평가를 내리죠.

뭐 한 가지가 좋았다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다 괜찮았다는 건, 
결국 다 애매했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임인 리프레인 블루도 지금 시점에서
다시 돌아볼 가치가 있을 정도의 게임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겠네요.

댓글 3개:

  1. 저는 리프레인 블루의 음악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운드트랙을 따로 계속 들을 정도로 음악이 좋았어요. 보컬곡도 좋았고 전체적인 배경음악도 좋았습니다. 말그다로 여름의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음악들이어서 없던 해변의 추억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픽으로도 엘프가 리프의 성공을 보며 비주얼 노벨스럽게 힘주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던 작품이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작품으로 봐야겠죠. 유노와 취작을 끝으로 당시 엘프는 뭔가 심각하게 길을 헤매고 있단 생각만 들었죠. 리프레인 블루는 시스템상 지루하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습니다. 리프도 전체화면 선택지는 줬는데... 강제 전체화면에 느릿느릿한 대사 속도는 조절도 안되고. 기타 부족한 옵션들. 엘프 게임 엔진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리프가 시스템에 있어서도 앞서갔었다고 보기 때문에 리프를 따라할거면 최소한의 편의성이나 시스템도 따라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런건 따라하질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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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제목에 오타가 났네요. 쓰신 글에 많이 동감하며 당시 실키즈 브랜드가 있었다면 그쪽으로 나오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Windows로 넘어오면서 엘프에서 요나오 케이시가 상당히 많은 작품의 음악을 담당했는데 이 작품도 그가 담당했습니다. 상큼한 분위기의 음악이 매우 좋았습니다.

    다시 남은 엘프게임 리뷰를 시작하신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저는 엘프게임을 발매순으로 하면서 하급생2까지 왔는데 진행에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합니다. 매인 이벤트를 제외한 기타 이벤트 대사 분석에 1주일, 타마키의 이벤트 제외 기타대사 분석에 1주일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백개먼님의 게임 진행 속도가 대단합니다.

    하급생2를 지금까지 해본 소감은 우선 게임 디자인이 전작과 너무 똑같아서 전작의 시스템에 만족했던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작에서 제가 단점으로 느꼈던 부분도 여전하며 대사마저 더욱 심심해진 느낌입니다. 이벤트나 대사의 양만 쓸데없이 늘어나 분석하는 내내 밋밋한 대사 분석을 계속 해야하나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시나리오 담당이 누구인지 보면 모닝 무스메라는 작가집단이라고 합니다. 하급생이 히루타 마사토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던 저는 혹시나 해서 전작의 스태프를을 다시 확인했는데 PC98판에는 게임 디자인에 히루타 마사토, 시나리오는 불명으로 나오며 Windows판은 게임 디자인, 시나리오에 엘프라고 나와있었습니다. 결국 하급생이라는 게임의 정체는 히루타 마사토가 게임 디자인에 관여하고 시나리오는 불명확한 다수의 사람들이 쓴 게임이라는 것이 됩니다. 하급생2를 하기 전 데자 멀티팩을 했는데, 시나리오 라이터의 차이가 게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 해본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데자가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다양한 게임을 접하지 않고 아직 엘프 게임에 빠져있지만, 언젠가는 여기서 벗어나 다른 재미있는 작품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백개먼님의 리뷰들이 그때 많은 지표가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리뷰를 쓰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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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feveriot//
    저도 예전에 플레이할 때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 특별히 DMM에서 나온 윈도우10 대응판으로 플레이하였습니다.
    근데 시스템상 수정이 하나도 안 되어 있더라고요.
    창 모드라도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러웠습니다.


    hityou2//
    제목은 오타라기 보다는 나무위키 제목과 똑같이 맞추려고 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렇게 적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역시 제대로 된 제목을 사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수정하였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리뷰를 일주일에 한 번 쓰는 건
    제가 옛날에 많이 플레이한 게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했던 게임들이라면
    평소 했던 생각들이나 예전에 적어 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일주일이면 충분히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게임 신청을 웬만하면 안 받기로 한 이유도
    일주일에 한 번씩 리뷰를 내기에 감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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