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일 일요일

리뷰 : 인간데브리(2010/11/26,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데브리>의 '데브리'는 영어 debris로 쓰레기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쓰레기라는 뜻이죠.

이 게임 발매 직전에 <미육의 향기>를 재밌게 하신 어떤 분이
저에게 비슷한 게임 추천을 부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미육의 향기>와 비슷한 게임은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곧 인간데브리가 발매되는데 이걸 플레이해 보는 게 어떠냐'고 얘기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분이 굉장히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장문의 감상문과 함께요.
그걸 본 저는 '그 정도인가?'라고 생각했었죠.

아무튼 인간 데브리는 발매 직전에는 
비슷한 게임이 별로 없었던 <미육의 향기>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게임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팬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위에 분과는 달리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는 슬픈 사연이 있죠.



이 게임은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입니다.
특정 엔딩을 보면 선택지가 늘어나는 구조로 되어 있죠.

그 외에는 그다지 눈여겨 볼만한 시스템은 없습니다.
3D 맵 이동 비슷한 게 들어있기는 한데
수동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죠.
그냥 스토리를 즐기는 게임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도텐 메이카이의 성향이나 당시 엘프의 흐름을 고려하면 네토라레 게임으로 생각되겠지만
네토라레 요소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서스펜스 드라마에 가깝죠.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에게는
히카리와 세이지라는 두 명의 소꿉친구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히카리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세이지와 히카리가 교제하게 됩니다.

자신이 히카리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난뱅이 세이지따위가 히카리와 교제하게 된다니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복수를 결의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상황만 듣고 '웬 복수?'라는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원래 상당수 에로게의 복수라는 게 불합리하죠.
그런 불합리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텐 메이카이의 작품에 나오는 상당수의 주인공은 정신이 이상한 편인데
이 게임의 주인공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정신세계를 자랑합니다.
완전히 맛이 간 놈이에요. 사고방식이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생각 하나하나가 인간 쓰레기 그 자체죠.

영문을 모르는 히카리가 주인공을 걱정해 주지만,
주인공은 쌀쌀 맞게 대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급발진할 때도 있죠.



초반부에는 히카리 시점도 종종 보여줍니다.
히카리는 주인공의 냉정한 태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자신의 언니인 소라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소꿉친구인 세이지가 어떻게 중재를 해 보려고 하지만
세이지 역시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세이지는 주인공에게 있어 모든 일의 원흉인데
그의 중재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히카리의 언니인 소라입니다.
직업은 버스가이드로 버스 운전수인 약혼자가 있죠.

주인공은 복수 계획의 시작으로 소라를 허름한 세이지 집으로 유인합니다.
히카리를 걱정하던 소라는 그대로 주인공의 유인에 걸려 들게 되죠.
잠깐 대화를 나누는 척하다가 소라를 습격하여 그대로 세이지의 집에 감금해 버립니다.
소꿉친구라지만 남의 집인데 지멋대로 드나들 뿐만 아니라
아예 감금 장소로 쓰고 있네요.
 


소라를 감금한 채로 주인공은 히카리, 세이지와 화해하려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사실 화해를 할 마음없이 계획의 일환이었고,
몰래 히카리의 엉덩이를 만지는 성희롱까지 합니다.
히카리는 간만의 화해무드가 깨질 것이 두려워 묵묵히 희롱을 참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세이지의 집에 가서 하루동안 감금되어 있는 소라를 협박해서 이상한 짓을 하고
또 소라의 사진으로 히카리를 협박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쯤에서 뭔가 스토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주인공의 계획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주인공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한다는 배드 엔딩입니다.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것 같지 않은데도 그냥 자살해 버리죠.



또한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명백하게 주인공이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공의 행위도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 있으며,
주인공이 하는 짓을 어딘가에서 찍은 사진까지 등장하죠.



금방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사실 주인공은 최면에 걸린 상태입니다.
히카리와 교제한 것도 허름한 집에 사는 가난뱅이도
사실 세이지가 아니라 주인공이었던 거죠.
소꿉친구 두 명의 교제에 열등감을 느끼고 복수를 계획한 쪽이 세이지였던 겁니다.

이 반전 자체는 훌륭했습니다.
처음 플레이했을 때는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미육의 향기>만큼 절묘하지는 않았습니다.
최면이라는 게 너무 강력한 수단이었던 나머지 세세한 계획이 필요없었죠.



남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최면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MC물 에로게라는 게 보통 비현실적이죠.
물론, 단순히 H씬용 MC물과 이런 서스펜스물을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할 순 없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거 자체가 비판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최면의 절대성에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세이지의 최면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답답한 모습만을 보여줬죠.
세이지는 학교 옥상에서 주인공을 계속 자살시키려고 했으며,
소라와 히카리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게임은 선택지로 무수한 분기와 엔딩이 있었지만,
최면의 사기성에 대항할 반격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어딘가 비슷한 것같은 H씬을 계속 감상해야 할 뿐이었죠.

반전은 너무 이른 시점에 밝혀졌고,
후반부를 채우는 것은 거기서 거기인 H씬밖에 없었습니다.
H씬이 많다는 건 에로게로서 장점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그 H씬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부분에서 피로감을 주는 방향으로 활용되었죠. 



그렇게 수많은 배드엔딩을 보다 보면,
비로소 배드엔딩을 회피할 수 있는 선택지가 새로 생기게 됩니다.
소라의 납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 가서 다른 선택지를 골라야 하죠.

트루엔딩 루트는 소라가 진작에 세이지의 최면에 대해 감을 잡고,
주인공이 더 이상 그 최면에 놀아나지 않도록 하는 스토리입니다.



이 스토리에서 소라는 주인공만을 너무 신경쓴 나머지,
세이지가 히카리를 납치해서 최면을 거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소라와 주인공은 세이지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히카리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투하죠.



소라의 노력으로 인해 주인공이 점점 제 정신을 되찾아 가는 스토리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소라가 지나칠 정도로 혼자서 무쌍을 찍었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이 스토리의 대부분은 소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이 게임은 소라의 캐릭터가 마음에 드느냐가
게임의 평가를 가를만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죠.



소라의 캐릭터는 확실히 매력적입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주인공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히카리와 이어질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아 왔습니다.
잠깐씩 나오는 과거 회상씬에서
쿨한 소라의 반응에서 새어 나오는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총평하자면, 나름 좋은 부분도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분량도 적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H씬이 취향에 맞는 분들께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게임이죠.

여성 캐릭터는 단 둘밖에 없었지만,
게임을 클리어하면 히카리의 캐릭터는 흐릿해집니다.
소라만을 보고 플레이해야 할 게임이죠.

스토리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도텐 메이카이의 텍스트는 언제나 흥미로웠지만
이 게임에서는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에요.

독특한 반전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를 이어나갈 스토리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시츄에이션을 중시한 나머지 시나리오가 희생되었다'는 평가가
이 게임에 대한 가장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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