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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2일 일요일

리뷰 : Blind Games(1996/8/24, May-Be SOFT)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Blind Games>는 무려 선상 서스펜스 게임입니다.
배 위를 무대로 삼은 게임은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정도이고,
그마저도 늘 실망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언제나 저를 기대하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무대도 그렇지만 제목도 당시로서는 세련되게 느껴졌기 때문에
당시 제가 이 게임에 걸었던 기대는 실로 엄청 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 기대는 깊은 심해까지 침몰하고 말았죠.


시기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주인공은 일본 항공기 제조사 직원입니다.
서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호화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합니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에 배에서 일본인은 주인공밖에 없습니다.



게임은 대체로 여객선의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캐릭터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장소 이동 & 대화는 메이비 소프트 게임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특별한 점은 없지만
이 게임에서는 특별히 실망스럽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주인공이 이동할 수 있는 장소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식당, 라운지, 갑판, 카지노 등은 이동할 수 있는 게 당연하죠.
근데, 기관실, 창고, 조타실, 선장실, 무전실...
무슨 주인공이 배 주인인가요?
선원도 아니고 손님이 왜 저런 곳에 갈 수 있는 거죠?
게다가 대부분의 저런 장소에서 딱히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계단A 왼쪽, 오른쪽/ 계단 B 왼쪽, 오른쪽/ 계단 C 왼쪽, 오른쪽...
어디가 어딘지 화면상 구분도 안 가는데 이런 장소들을 세분화할 이유가 있나요?
신경써서 돌아 다니지 않으면 갔는지, 안 갔는지 기억도 안 나는 장소들입니다.
객실은 XX의 방, YY의 방 정도로 구분했으면 좋잖아요.



두 번째, 문제점이자 이 게임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게임 디자인입니다.
장소 이동 & 대화 시스템이 사용되는 구간은 게임시간으로 6일 정도입니다.
하루는 대충 아침, 점심, 오후, 저녁, 밤의 다섯 시간대로 나뉘어 집니다.
한 시간대에 돌아다니면서 세 번정도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플레이어에겐 6 곱하기 5해서 30번의 시간대가 주어지며,
세 번씩 이야기할 수 있으니 대화 기회가 90번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메인 캐릭터인 셰리와 에밀리아는 선택지를 잘 골랐다는 가정하에,
필요한 대화 횟수는 각각 10번입니다.
선택지를 잘못 골랐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각각 대충 20번 정도 만나면 됩니다.
서브 캐릭터 중에서도 대화를 10번 정도 하면 H씬을 볼 수 있는 캐릭터가 두 명 있죠.
여기까지의 합이 대충 60번이죠.

그럼 나머지 30번은 뭘 할까요?
그외 서브 or 엑스트라 캐릭터하고 대화를 하거나,
이미 이벤트 다 본 캐릭터와 중복으로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소피아와의 엿보기 이벤트가 몇 번 있죠.


중요하지 않은 엑스트라 캐릭터와의 대화부터 살펴 봅시다.
일단, 말을 걸면 '난 일본인이 싫어서 일본인 하고 대화 안 해.'라든가
'잽'이라고 모욕하는 아예 대화 자체가 안 되는 엑스트라들이 나옵니다.
6일 내내 똑같은 말만 합니다.

만날 때마다, 다른 화제를 꺼내는 대화를 하는 엑스트라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객선 선장님인데, 항해나 크라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합니다.
대화 전개가 어떻게 되냐면,

선장 : 오늘은 크라켄에 관한 대화를 하지.
나레이션 : 크라켄에 관한 대화를 했다

가 끝입니다. 저 대화에서 크라켄만 바꾸면 여러 화제가 되는 겁니다.
엑스트라와의 대화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10번정도 대화하면 H씬이라도 볼 수 있는 서브 캐릭터와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서브 캐릭터 중 하나인 마리아입니다.

말을 걸면, 바빠서 대화할 시간 없다고 합니다.
H씬이 있는 5번째 대화와 10번째 대화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대화에서 똑같은 말만 합니다.
이 대화도 쥐뿔만큼도 쓸모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인 캐릭터인 셰리와 에밀리아와의 대화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 캐릭터에는 그나마 만날 때마다 대화와 선택지가 준비되어 있지만
패턴이 대개 비슷하고, 너무 많이 만나면 중복되는 대화와 선택지가 나올 때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점은 엑스트라나 서브캐릭터는 그냥 똑같은 대사만 나오고,
메인 캐릭터도 너무 많이 만나면 대사가 중복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할 말도 없으면서 왜 대화 기회를 90번이나 만들어 놓은 거죠?
쓸데없이 플레이타임만 늘어나잖아요.

6일이라는 시간을 좀 줄이든가,
하루를 '오전/오후' 혹은 '아침/점심/저녁' 이 정도로 나눴으면 고생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 들었겠죠.
요즘 같으면 시간을 그냥 넘기는 커맨드라도 만들어 놓았겠지만 이 시절에는 그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게임에는 이동할 수 있는 장소도 쓸데없이 많습니다.
90번이나 캐릭터를 만나기 위해 고생고생하며 이 장소, 저 장소 돌아다니면서
막상 만나면 별 할말도 없는 게임이 되어 버린 겁니다.



지루한 잡담 사이사이에 스토리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셰리의 방을 누군가가 습격합니다. 주인공은 습격한 사람을 쫓아가죠.



창고에서 만난 스파이입니다. 주인공은 오히려 스파이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게 됩니다.
다행히, 무선 담당 선원이 쓰러져 있는 주인공을 도와줬습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면, 지루한 대화만 하던 게임이
슬슬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죠.
참고로, 이 사건이 벌어진 건 3일째입니다. 잡담은 6일날 밤까지 하고요.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사람들과 하는 얘기는 그냥 잡답 뿐이라는 겁니다.

주인공이 정체모를 스파이에게 습격당하고, 
주인공이 특별히 노려지는 이유도 의문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고는 선장하고 크라켄 대화나 나누는 거에요.

스파이가 식당에 미약을 뿌리는 바람에
식당에서 손님들의 난X파티가 벌어지는 이벤트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약의 효과가 풀린 후에,
뭘 했는지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이 패닉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정말 친절한 스파이입니다. 미약이 좀 남아서 의미없이 뿌렸나 보군요.

서스펜스물다운 이벤트가 가끔씩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긴장감을 끊어먹고, 지루한 잡담에 집중하게 하려는
제작자들의 배려가 엿보입니다.



캐릭터는 꽤 괜찮은 편입니다.
상술한 단점이 정말 크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애정이 없는 게임은 아닌데
셰리와 에밀리아의 캐릭터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털털한 스타일의 카지노 딜러 셰리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 스타일의 에밀리아 둘의 개성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두 캐릭터 모두 주인공에 대한 초기 호감도가 나쁘지 않아 포지션이 비슷한데도
각자의 색깔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본격적인 스토리에 들어가면 에밀리아에게 반전 매력이 있는데
그 또한 마음에 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소재나 분위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게임은 웬만하면 재미있게 하는 편인데,
이 모든 장점들을 씹어먹는 시스템을 가진 게임입니다.

단점은 정말 명확합니다.
가끔 플레이 도중, 테스트도 다 해봤을 텐데 왜 게임이 이렇게 출시됐을까하고
의문이 드는 게임들이 있는데 이 게임이 그런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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