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계가족> 시리즈를 2편-1편-3편의 순서로 플레이했었는데
그 중에서 1편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엄청나게 실망했던 게임이었습니다.
일단 여계가족이라는 제목은
1963년도에 나온 <여계가족>이라는 소설에 기반하고 있는데
저는 과거에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더라고요.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 뚜렷이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여성의 파워가 강한 가문에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미약했던 남자 당주가 사망했고,
이후 드센 딸들의 유산 상속 싸움에 관한 스토리였습니다.
그 와중에 재산 관리인이 딸들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고,
숨겨둔 애인이 재산 관리인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등
통수의 통수였던, 적당히 괜찮은 소설이었죠.
저는 게임 여계가족 1편, 2편을 플레이한 이후에야 소설을 읽었는데
스토리 자체는 전혀 접점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부자 가문인 산노우지 가문에
자신의 형이 써 준 유서 한 통을 들고 갑니다.
주인공의 형은 산노우지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이런 저런 중압을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을 시도했고,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유서에는 자신의 모든 유산을 주인공에게 상속한다고 쓰여있죠.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말뼈다귀가 모든 유산을 가져 가겠다고 나타났으니까요.
현재 산노우지 가족은
어머니 미유키, 장녀 쿄코, 차녀 카오리, 막내 우라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딱 보기에도 장녀 쿄코는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데
다른 캐릭터는 첫 인상으로 평가하기가 힘들군요.
유서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서는 주인공에게 있어 유일한 무기입니다.
유서가 훼손되면 주인공은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고 하니
유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일이죠.
이 중요한 유서를 미유키에게 맡길 것인지 선택지가 뜨는데
뇌가 달려 있는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거부해야겠지만,
이번엔 과감하게 맡긴다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선택지 하나로 미유키가 적인지 아군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보는 거죠.
하지만, 넘기는 도중에 장녀 쿄코가 유서를 채가서 찢어 버립니다.
주인공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난리를 피우는 도중에
미유키는 아예 둔기로 주인공의 뒤통수를 찍어 버리죠.
배드 엔딩을 보게 되었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미유키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요.
아직 형이 죽은 건 아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저택에서 기다리기로 한 거죠.
이렇게 산노우지의 여성들과 같이 살게 된 주인공의 속마음에는
유산뿐만이 아닌 산노우지의 여성들 전부를 손에 넣겠다는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그럴 듯한 게임입니다.
엄청난 유산을 두고 서로 눈치싸움을 하는 여성들과
그 사이에서 중요한 키를 쥐고 여성들을 노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이 게임은 제 에로게 인생에서도
역대급에 속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던 게임입니다.
스토리가 지나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죠.
사실은 미유키가 데려 온 양녀로 다른 자매들과 피가 이어져 있지도 않아
장녀인 쿄코에게서 눈총을 받고 사는 처지입니다.
현재 미유키는 집안이 어수선하다는 핑계로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의 스토리가 지나치게 미흡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사는 카오리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평불만없이 자기 일을 수행하는
착하고 상냥한 캐릭터죠.
유산 싸움에도 딱히 관심이 없고,
주인공을 적대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꿍꿍이 없이 주인공 형 병문안을 가기도 하는
이런 완벽한 캐릭터를 주인공이 덮쳐야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게임 내에서는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냥 만만해서인 것 같습니다.
캐릭터가 메인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없어요.
주인공과 미유키가 카오리를 두고 기싸움을 하는 장면도 있는데
어중간하게 흐지부지되어 버립니다.
역시 유산에 별 관심이 없는 캐릭터지만 마냥 순수한 건 아니고,
4차원 성격에 음란한 일에도 관심이 좀 있죠.
유산에는 전혀 관심없는 애송이입니다.
그 유서라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느냐 하면 그조차도 아닙니다.
카오리도 그렇고, 우라라도 그렇고,
좀 유산 갖고 싸웠으면 좋겠는데
너무 어린 애들이라서 그런지 유산에 관심들이 없습니다.
우라라 같은 캐릭터를 유산에 관심은 없지만 본인 몫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분란의 중심에 서는 그런 캐릭터로 설정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그냥 스토리에서 동떨어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어요.
쿄코는 주인공 형과 혼인한 관계로 주인공에게는 형수가 되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형의 자살에는 쿄코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죠.
척보기에도 기가 세 보이는 캐릭터이며,
유산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캐릭터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에게는 형의 원수죠.
믿습니다. 쿄코님.
제발 산노우지 가문을 유산 상속의 개싸움판으로 만들어 주세요.
제 소원에 화답하듯이 쿄코는 첫날 밤 주인공을 찾아옵니다.
자신에게는 아직 법적으로 유류분이 있다면서
이 싸움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쿄코를 어떻게 설득할까요?
설득 그런 거 필요없고 그냥 물리적인 방법을 씁니다.
밧줄로 쿄코를 묶어 버리죠.
이런 야만적인 방법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쿄코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주인공은 바로 쿄코를 덮치지 않고,
쿄코를 완벽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협박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이대로 하룻밤동안 묶어 두면 팔이 썩어서 잘릴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협박이 통하죠.
아니, 쿄코는 초등학교도 안 나온 겁니까?
지금 산노우지 가문의 유산을 걸고 일생일대의 싸움을 하고 있는데
협박 내용이 지나치게 뜬금없고, 허술하고, 어처구니가 없잖아요.
심지어 CG상으로 보면 손목을 그렇게 세게 묶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꼼지락꼼지락하면 그냥 빠져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우리의 기대주 쿄코는 이렇게 첫날에 함락당했으며,
주인공에게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는 신세로
딱히 존재감 없는 캐릭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깝군요.
마지막 희망은 모친 미유키입니다.
다행히 미유키는 적당히 음모도 꾸미면서,
한편으로는 주인공을 회유하려고도 하는 등
주인공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캐릭터입니다.
미유키의 약점도 금방 잡았지만
미유키는 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음험한 캐릭터입니다.
다만, 딸들이 다 부진한 상태에서
미유키 혼자 이 게임을 살리기엔 한계가 있었죠.
계략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고요.
여성 캐릭터들이 아쉽더라도
주인공의 캐릭터가 괜찮았다면 게임이 살아날 방법은 있었을 겁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들을 탁월한 능력의 주인공이
등쳐먹는 스토리로 가는 거죠.
하지만, 주인공도 한심할 정도로 능력 부족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여성 캐릭터 둘은 주인공에게 적대할 의지도 없었으며,
쿄코를 이긴 방법은 너무 허술했고,
미유키를 위협한 방법도 다른 사람에게 거저 얻은 겁니다.
이런 자잘한 순간들을 제쳐두고 봐도,
애초에 누구와 협력하겠다, 어떤 방법으로 차지하겠다 이런 대전략도 없이
그냥 유서 하나 딸랑 들고 가서 여성 캐릭터들을 덮치는 게
주인공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유산과 미녀들을 모두 손에 넣겠다'는 포부만 컸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커녕, 추상적인 지침도 없이
그냥 산노우지 저택에 들어간 것뿐입니다.
그냥 산노우지 저택 출입증 역할 밖에 못하는 유서 하나만 믿고 있는 거에요.
유서를 뺏기는 바람에 망했다 하는 엔딩이 한 두개가 아니에요.
유서는 문단속도 하지 않은 방구석에 있고,
지퍼만 열면 그냥 열리는 가방 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주인공이 방을 잘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짜를 준비했다거나 하는 대비책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허술한 방비와 산노우지 가족들의 양심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고서 유서가 사라지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처럼 좌절합니다.
하다 못해 가방 맨 밑에라도 숨겨 놨어야죠.
산노우지 가족들과 주인공이 형편없는 상태에서
유산을 노리는 제3자라도 멋진 악역이 되어 준다면
어떻게든 이 게임이 살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오면 쉽게 예측가능하지만
제3자 캐릭터가 게임을 살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산노우지 가문의 고문 변호사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주인공을 뒤통수치고 자신이 산노우지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역시 구체적으로 뭘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존재감이 없어요.
주인공은 대놓고 이 캐릭터를 믿지 않고,
몇 개의 엔딩을 제외하면 그다지 활약도 없습니다.
캐릭터의 역할이 있기는 한데,
굳이 없어도 상관없는 캐릭터에요.
주연, 조연 구분없이 다 망했습니다.
게이머들이 에로게 스토리에 기대하는 건
눈물나는 감동, 흥미진진한 모험, 열혈의 배틀, 높은 지적 유희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스토리를 갖춘 에로게도 있고,
그 중에서도 잘 만든 게임들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모든 에로게가 그걸 목표로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스토리는 있어야 합니다.
이 게임의 문제점은 그 수준의 스토리조차 없다는 거에요.
부자집 아가씨를 모아 놓고 유산싸움을 하고,
주인공은 그 싸움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좋은 환경을 왜 이용하지 못하는 겁니까.
유산에 관심도 없고 부자집 아가씨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냥 덮치기만 하는 주인공까지
모든 캐릭터가 이 게임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4개의 멀티엔딩이 있는데 무의미하게 개수를 늘린 엔딩이 많았죠.
희한했던 배드엔딩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전철에 타고 있던 주인공은 카오리가 치한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와준다'와 '도와주지 않는다'가 선택지로 뜨죠.
'도와준다'를 선택하면, 이도 저도 아닙니다.
주인공이 도와주려고 가는 도중에
마침 치한 행위가 끝나 버리는 바람에 카오리도, 치한도 사라져버리죠.
주인공도 그냥 제 갈 길 갑니다.
근데 '도와주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전철이 급정지하는 바람에
옆에 서 있던 뚱뚱한 아줌마에게 깔려 정신을 잃는다는 배드 엔딩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엔딩인데요.
플레이하는 저도 정신을 잃을 정도의 엔딩입니다.
이렇게 어거지로 늘린 멀티 엔딩이 대체 무슨 소용이랍니까?
도와주는 것도 안 도와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선택지입니다.
이후의 여계가족 시리즈도 스토리는 부실합니다만
분위기만은 맛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이 게임은 설정을 살리고 못살리고의 수준이 아니라,
설정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따로 노는 수준의 게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차라리 유산상속 문제가 없었다면
카오리나 우라라의 캐릭터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잘 살릴 수 있었던 설정과 잘 살릴 수 있었던 캐릭터로
이 정도 결과물 밖에 못 뽑아냈다는 점이 참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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