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9일 일요일

리뷰 : Figure ~빼앗긴 방과후~(1995/9/29, 실키즈)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Figure ~빼앗긴 방과후~>, 제목만 들어 보면 스케일이 굉장히 작아 보입니다.
다른 작품은 미래를 빼앗기고, 그녀를 빼앗기고 할 때,
이 게임은 방과후를 빼앗깁니다.
오늘부터 야자라도 하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단순한 명령 선택식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이 게임만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 특성은 스토리와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주인공은 비상근으로 명문 여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는 미시마라고 합니다.
변호사의 아들이며, 영국 3년 유학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건 다 사기입니다.

사실은 시미즈 선배라는 재벌 2세의 부하 격으로 학교에 잠입했을 뿐입니다.
임무는 시미즈 선배의 취미인 '야한 비디오'에 출연할 여학생들을 데려오는 겁니다.
당연히 범죄이지만 시미즈 선배의 재력으로 어떻게든 된다는 설정입니다.



그리하여, 이 게임은 착하디 착한 여학생들을 감언이설로 속여서 유인하는 게임입니다.
여자를 데려가는 데 실패하면 냉정하게도 바로 배드엔딩을 봐야합니다.
스토리가 한 가지 큰 메인 줄기가 있고 중간중간에 선택지에 따라
몇가지 배드 엔딩이 들어있는 방식입니다.


주인공이 시미즈 선배에게 여자들을 바치는, 능동적인 NTR 구성은 독특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이 진짜로 독특한 이유는,
이런 게임의 주인공 답지 않게 주인공이 엄청나게 고뇌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점입니다.



이 게임의 선택지 방식입니다.
다른 게임의 선택지와 달리, 하나의 명령을 선택해도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용이 조금씩 바뀌며 끊임없이 선택지가 등장합니다.
주인공도 이와 같이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이 게임은 고뇌의 연속입니다.


소위 말하는 '우울 계열' 게임입니다.
사실 다른 게임 장르도 그렇지만 우울게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분류해 놓은 걸 보면,
인류가 멸망하는 스케일의 게임도 우울게고,
그냥 주인공이 불쌍해도 우울게고,
그냥 슬퍼도 우울게입니다.

내용이 시종일관 음울한 분위기도 우울게고,
신나는 개그 게임에 서브 캐릭터 스토리가 얀데레라도 우울게고,
배드 엔딩이 우울하다고 우울게라는 분류도 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무 내용없이 웃고 즐기는 게임 혹은 H씬만 즐기는 게임만 제외하면
다 우울게인 것 같아요. 이런 식의 분류는 이상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Figure ~빼앗긴 방과후~는 빼도 박도 못할 우울게입니다.


게임이 시종일관 우울한 분위기에서 진행됩니다.
게임 내 설정된 상황도 우울하지만, 주인공은 더더욱 우울해 하고,
그 우울함은 플레이어에게까지 전염됩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볼거리는 또라이같은 주인공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주인공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고뇌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죄를 멈추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더 심한 짓을 저지를 예정이면서,
학교 내의 레즈비언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태도도 가지고 있습니다.



큰 고뇌를 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사악한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행위가 다 끝난 다음에는 '아,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믿고 함정으로 따라오는 여학생에게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다니. 너는 잘못됐어.'라고 속마음으로 화를 냅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끊임없이 남탓을 하며, 자기 정당화를 합니다.



마지막에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들켰을 때는,
대부분이 사실인데도 억울해하며 오해라고 변명하고 다니는 추태까지 보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변명을 믿어 주지 않고 주인공을 경멸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에로게 역사에 남을 찌질한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인공에 대한 게임 내의 심리 묘사는 상당히 훌륭합니다.
훌륭하면 훌륭할 수록 플레이어의 기분은 더러워질 뿐이지만요.
혹자는, '좋은 의미'로 이 작품은 우울증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특이한 점을 하나 더 언급하자면,
주인공에게는 전여친이 있습니다.

게임에서 등장은 거의 하지 않지만
플레이어가 매일 저녁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싶다'는 선택을 하면
이 전여친에게 전화를 겁니다.

전여친의 디폴트 네임은 아유미인데, 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 가능합니다.
주인공의 이름도 바꿀 수 없는데 말입니다.
더 특이한 것은, 이 전여친의 이름이 어떻느냐에 따라 게임 진행에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별로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CG를 다 보기 위해서는 최소 세 번은 전여친의 이름을 바꿔가면서 플레이해야 한답니다.
정말 특이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총평하자면, 개인적으로 기분이 더러워지는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은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신나는 스토리의 게임을 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추구하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호불호와는 별개로 
게임이 추구한 바를 정말 잘 그려낸 게임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에게,
그리고 대체 우울게가 어떤 식인지 궁금해하시는 분에게,
마지막으로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좀 다운되고 싶다는 분에게
이 게임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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