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일 일요일

리뷰 : 육체전이(2004/2/11, 실키즈)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육체전이>는 '몸 바꾸기' 장르입니다.
표현이 아쉽긴 한데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네요.
TS 요소도 있고, TS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쪽을 기대하시는 분들에게는 TS 요소가 적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됩니다.



캐릭터부터 살펴 봅시다. 전형적인 남주인공 스타일의 켄이치입니다.
건실한 청년으로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남몰래 켄이치에게 호의를 갖고 있죠.



켄이치의 소꿉친구인 미호입니다.
켄이치와 가장 가까운 관계로 켄이치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갖고 있지만
츤데레 성격이라서 그 마음을 좀처럼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켄이치, 미호와 같이 소꿉친구인 요시미입니다.
한 학년 높은 누님과 같은 존재죠.
미호는 켄이치가 요시미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켄이치는 요시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깊은 감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켄이치는 고고학부이고, 미호와 요시미는 경음악부에 속해 있습니다.



켄이치의 고고학부 후배인 히카루입니다.
얌전한 성격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켄이치에게 가장 열렬한 사랑을 품고 있죠.



켄이치, 히카루와 함께 고고학부 소속인 타카히토입니다.
평소에는 고고학부에 잘 출석도 안하는 유령부원이고,
친화력도 없는 무뚝뚝한 불량학생입니다.

기타 등장인물도 있지만,
일단 이 다섯 명이 서로 영혼이 뒤바뀌는 캐릭터들입니다.



어느 날, 고고학부에 희한한 유물이 소포로 도착합니다.
유령부원인 타카히토도 나타나고,
고고학부가 아닌 미호와 요시미도 구경하러 오죠.

갑자기 저 유물에서 빛이 나더니,
다섯 명은 학교 이곳 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정신이 들어 보니 각자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위의 장면은 켄이치의 시점에서 보이는 게임 화면입니다.
오른쪽 아래에 요시미의 얼굴이 보이는데,
켄이치의 영혼이 요시미의 몸 속에 들어갔다는 뜻이죠.
주인공의 눈앞에 보이는 켄이치는 켄이치의 몸에 들어간 미호입니다.



이런 시스템이다 보니, 여자 말투로 말하거나
여자처럼 얼굴을 붉히는 남성 캐릭터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미소녀 게임을 하면서 보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말이죠.
이런 묘사가 적지 않아서 이 부분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플레이어가 좀 있었습니다.



이 게임은 굉장히 야심이 컸던 게임입니다.
무려 다섯 캐릭터의 멀티 시점으로 진행되죠.
처음에는 켄이치 외의 다른 캐릭터의 시점은 잠겨있지만
게임을 진행하고, 일정한 엔딩을 본다면
다른 캐릭터의 시점이 하나씩 오픈됩니다.



다섯 개의 멀티 시점 시스템이 가진 문제점은 일단 지루함입니다.
위의 장면은 육체전이가 일어나기 전에 프롤로그로
모든 등장 캐릭터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장면이 아닌데,
이걸 제각각의 시점으로 다섯 번이나 봐야 하죠.

아니, 고작 점심 먹는 장면에서 켄이치 시점이든, 미호 시점이든, 타카히토 시점이든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적당히 생략하고 요약해서 스토리를 좀 더 간결하게 만들었어야죠.
생략되는 장면도 없진 않지만 많은 장면이 캐릭터마다 중복되고,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은 문장 스킵은 안 됩니다.



지루함보다 더 큰 문제는 산만함입니다.
멀티 시점 게임의 장점 중 하나는
'캐릭터들이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는 캐릭터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켄이치와 미호가 같은 장소에서 대화를 하는데도 
둘의 시점 묘사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시점 묘사를 통해 그 시간에 히카루가 문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는 등의 
새로운 내용을 표현할 수도 있는 거죠.



이게 제대로 되려면 지금이 어느 때인지,
다른 캐릭터가 이 때 무슨 생각을 했거나 무슨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 등이
먼젓번의 플레이를 통해 플레이어의 머리 속에 대충이라도 들어 있다면 좋겠죠.

근데, 멀티 시점이 다섯 개나 되는 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다른 네 명의 캐릭터들의 시점을 다 플레이하고
마지막으로 타카히토의 시점을 플레이한다고 했을 때,
다른 넷의 스토리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멀티 시점보다 더 큰 문제점은 '멀티 엔딩'입니다.
무려 30개에 달하는 멀티 엔딩이죠.
이 게임은 다른 실키즈의 게임과 마찬가지로
선택지에 따라 스토리의 분기가 만들어지는 스타일입니다.

분기에 따라서 캐릭터들이 
다른 캐릭터들의 육체와 유물의 힘에 이끌려 성적인 의미로 타락하는 스토리도 있고,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맞이 하는 엔딩도 있습니다.



문제는 플레이할 수 있는 다섯 명 모두
본인의 선택지와 본인의 분기가 있다는 겁니다.
게임 도중에 선택지가 뜨고, 그 캐릭터가 알아서 선택지를 지맘대로 골라 버립니다.
예를 들어 제가 켄이치 시점으로 플레이하고 있는 도중에도
미호는 자기가 알아서 선택지를 띄우고,
본인 마음대로 선택지를 골라 버리는 거죠.

시점이 많아서 다른 캐릭터들의 스토리를 기억하기가 힘든데,
그 스토리마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자기만의 선택지와 멀티 엔딩을 갖고 있다는 거죠.

이런 시스템 때문에 제 앞에 있는 캐릭터가 타락 루트를 탄 캐릭터인지, 
정신차린 루트를 탄 캐릭터인지 알아내기가 힘들어요.
켄이치의 스토리를 플레이했다면 이후 플레이에서
켄이치가 이 때쯤 뭘 했고, 무슨 생각을 갖고 있고 등을 알 수가 있어야 하는데
이 게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죠.


멀티 시점하고 멀티 엔딩은 함부로 같이 쓰면 안 되는 금기 조합입니다.
멀티 시점을 써야겠다면 부분적인 컷씬으로 다른 캐릭터의 시점을 묘사하든지,
아니면 각 캐릭터들의 행동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었어야죠.

다섯 캐릭터의 스토리를 최종적으로 하나로 모았어야 했는데,
이 게임은 각각의 스토리를 모두 흩어 버렸습니다.
차라리, 플로우 차트라도 있어서 지금 플레이어가 
어느 루트의 어느 시점에 있는지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더 알기 쉬웠을 텐데,
그런 부분의 노력도 전혀 없었죠.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더더욱 혼란스러워지는 요소가 첨가되는데
그게 바로 '육체전이'입니다.

이 게임은 다섯 캐릭터들의 영혼이 뒤바뀌는 '몸 바꾸기' 장르입니다.
영혼이 한 번 바뀌고 끝까지 스토리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 내내 계속 뒤바뀌죠.
그것도 영혼이 뒤바뀌는 순서나 바뀌는 시간에 관한 규칙도 없이 그냥 막 바뀌어요.
스토리 진행 중에 갑자기 '으아아아'하더니 
갑자기 다른 캐릭터 몸 속에 들어가 있고 그럽니다.

'육체전이'가 예측이 안 되다 보니,
스토리가 너무나도 조잡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실제 사례를 한 번 봅시다.
한 밤중에 학교 옥상에서, 미호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켄이치는
켄이치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미호를 위로하는 중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육체전이'가 일어납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켄이치의 영혼은 타카히토의 몸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근데 놀랍게도 타카히토는 양호실에서 히카루와 H를 하는 도중이었죠.
히카루가 말하길,
원래 타카히토의 몸에는 히카루가, 히카루 몸에는 타카히토가 들어 있었는데
히카루의 몸에 들어간 타카히토가 
타카히토의 몸에 들어간 히카루를 덮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갑자기 '육체전이'가 일어나 원래 몸으로 돌아간 히카루는
'육체전이'를 통해 타카히토의 몸에 켄이치가 들어온 것을 눈치챘고,
평소 좋아했던 켄이치를 위해서
타카히토의 몸에 들어간 켄이치와 H를 계속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때 켄이치의 몸에 들어있던 미호는 '육체전이'를 통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갔는데,
이제 켄이치의 몸에는 타카히토가 들어왔고
켄이치의 몸에 들어간 타카히토는 미호에게 양호실에 가 보라고 합니다.
양호실에 간 미호는 타카히토의 몸에 들어간 켄이치가 
히카루와 H씬 중인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카루의 시점으로 보니,
원래 타카히토와 히카루는 원래의 몸에 들어 있었고,
유물의 힘에 타락한 히카루가 타카히토를 덮쳤던 겁니다.


...정말 이 혼란의 끝은 어디일까요.
단 한 장면에서 너무나도 많은 상황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텍스트로만 읽어서 그렇지,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면 이보다는 덜 혼란스럽습니다.

근데 이런 장면이 계속 등장합니다.
안 그래도 '멀티 시점'과 '멀티 엔딩'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임인데
'육체전이'까지 일어나면서 스토리는 더더욱 난잡해지죠.

'멀티 시점'과 '멀티 엔딩'으로 인해
지금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그 상황마저 '육체전이'라는 설정으로 상황이 갑자기 뒤바뀌어 버리는 겁니다.



욕심을 많이 부린 보람은 있어서
산만한 와중에 좋은 장면이 꽤 있긴 합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만나자마자 친구의 몸 이상을 눈치채는 우정을 표현한다든가
타카히토가 분탕을 칠 줄 알았는데 히카루가 진정한 분탕이었다는 반전이었다든가
불량학생으로 보이는 타카히토가 의외로 상냥한 성격이라든가
좋은 장면은 많았죠.
H씬도 많고, 백합 엔딩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장면들이 전반적인 산만함 때문에 
잘 연결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멀티 엔딩'도 버리고, 좋은 장면이라도 과감히 잘라낸 후에
좀 더 간결하게 게임을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총평하자면, 너무 많은 것을 하려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게임입니다.
복잡한 스토리일수록 단순하게 풀어 나가야 하는데
이 게임에서는 스토리의 조잡함을 해결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멀티 시점'으로 인해 좋은 장면이 많이 나왔고,
'육체전이'는 게임 제목이라 포기할 수 없으니,
이 경우는 '멀티 엔딩'을 포기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죠.
적어도, 10개 이하의 엔딩이었어야 합니다. 30개는 너무 많아요.
실키즈의 '멀티 엔딩'에 대한 집착이 낳은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굳이 플레이를 하시려는 분들은 인터넷 공략을 보고
정해진 순서대로 플레이하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나마 이 게임의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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