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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리뷰 : EVE The Lost One(1998/3/12,시즈웨어)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VE burst error>는 높은 명성을 지닌 게임으로
에로게치고는 상당히 많은 속편 시리즈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게임은 세가 새턴으로 발매된 <EVE The Lost One>으로
<EVE burst error> 이후 3년만에 발매된 첫 속편입니다.
<EVE burst error>를 플레이하고 깊은 감명을 받으신 분들이
EVE 시리즈의 수많은 속편들을 한 번 플레이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제껴야 하는 작품이죠.

이거 하지 마세요. 쓰레기입니다.
이 게임에 대한 평가로 인상 깊었던 것은,
'속편을 만들려면 적어도 시나리오 라이터만큼은 전작을 플레이해 봐야 할 거 아니냐.'가 있습니다.

부제부터가 Lost One입니다. 잃어 버려야 할 작품이라는 거죠.
참고로 PC에 이식되면서 <THE LOST ONE Last chapter of EVE>라고 제목을 바꿨는데
Last chapter라는 부제에서 이 시리즈를 여기서 망하게 하려고 했던
속셈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게이머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역시 주인공의 변경이 아닐까 합니다.
전작의 코지로와 마리나라는 검증된 주인공 캐릭터를 버리고,
'쿄코'와 '스네이크'라는 신 캐릭터를 더블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사실 주인공 교체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코지로&마리나, 기타 조연 캐릭터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런 캐릭터들의 이후 활약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 기대를 저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유념해야 할 점은 이 게임은 시리즈의 2편이라는 겁니다.
'EVE 시리즈의 주인공은 무조건 코지로와 마리나다'같은 법칙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죠.
주인공의 변경은 할 만한 시도였다고 봅니다.
문제는 변경된 주인공들이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뿐이죠.



우선 내각 조사실의 신입 조사원 쿄코부터 살펴 봅시다.
첫 출근을 위해 옷을 고르던 중 백화점이 폭탄 테러에 휘말려서 부상을 입게 됩니다.



몸이 튼튼했던 건지 큰 부상은 아니었고
정상적으로 출근하게 됩니다.
전작에 등장했던 본부장도 보이고,
쿄코를 지도해 준 공포의 교관 마리나도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쿄코의 캐릭터성은 마리나에 많이 미치지 못합니다.
마리나만큼의 능력도 없고, 딱히 드라마틱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죠.
이후 작품에서는 개그 캐릭터로 등장했습니다.



다른 주인공인 스네이크 시점도 살펴 봅시다.
백화점에 장난으로 설치한 폭탄이 생각보다 위력이 강해서 당황한 스네이크는
현장을 보러 갔다가 쓰러져 있는 쿄코를 보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첫 대면이죠. 초중반부의 거의 유일한 대면이기도 합니다.



집에 돌아가 보니, 웬 곰인형이 스네이크의 컴퓨터 화면에 등장합니다.
곰인형을 뒤에서 조종하는 범인은 자신을 아도니스라고 소개하는데
'폭탄 테러가 너의 소행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스네이크를 협박하죠.

곰인형 같은 귀여운 모습으로 싸이코 같은 표현을 하는
아도니스의 캐릭터 자체는 나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곰인형을 조종하는 배후의 범인 캐릭터는 형편없었지만요.

아도니스는 '너를 이제부터 스네이크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주인공의 이름이 스네이크가 된 거죠.
하지만 스토리를 모두 플레이해 본 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스토리상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네이크라는 이름을 써서 다른 범죄자들과 협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스네이크라고 자칭해서 협박을 한다거나 테러를 하는 경우도 없어요.
대외적으로 스네이크라는 이름은 전혀 쓰이지 않습니다.
그냥 저 곰돌이가 '어이! 스네이크!'라고 부를 때만 씁니다.
그럼 그냥 본명 부르면 되잖아요. 왜 닉네임을 붙인 겁니까?



사실 그 이유는 스네이크의 정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쿄코 시점으로 진행하다 보면,
유지라는 컴퓨터를 좋아하는 소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쿄코가 딱히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소의 보안을 해킹해서 쿄코를 도와주죠.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성격이라는 걸 보여 줍니다.
그 외에도 유지가 스네이크라는 복선이 많이 깔리죠.
하지만, 이 캐릭터는 스네이크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스네이크의 진짜 정체는 요이치라는 쿄코의 선배 수사관으로
견실하고 우수한 수사관입니다.
이런 사람이 왜 장난삼아 폭탄 테러를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렇답니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은 스네이크가 유지인 척 보이면서
사실은 요이치였다는 서술 트릭을 쓰고 있는 게임인 겁니다.
스네이크가 스네이크로 불린 이유는 본명을 부르면
플레이어에게 바로 들키기 때문이고요.


EVE 시리즈의 멀티 시점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이 서술 트릭은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그 시스템과 어울리는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이런 도전 자체는 괜찮게 평가합니다.

적어도 이 게임의 제작자들은 멀티 시점 시스템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이 있었다면, 이게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그렇지 못했죠.
이 서술 트릭이야말로 이 게임이 지닌 모든 문제들의 시작입니다.



<EVE burst error>는 코지로와 마리나 두 스토리의 분량 차이가 없었고,
어느 쪽이 우위라고 쉽게 평가내리지 못할 정도로 둘 다 매력적인 스토리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두 주인공이 마주치는 장면을 넣어 놓으면서
서로 간의 스토리에 시너지 효과를 주었죠.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런 매력들이 전부 사라졌어요.
스네이크 시점의 스토리는 쿄코의 스토리에 종속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스네이크는 컴퓨터 속의 곰인형하고는 그럭저럭 대화를 하지만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고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 말이 많아지면 서술 트릭이 들키니까요.
마찬가지의 이유로 쿄코와 마주치는 장면도 스네이크 시점에는 넣어 놓을 수 없죠.

스네이크 시점의 스토리가 너무나도 부실합니다.
CCTV를 해킹해서 쿄코를 관찰하는 장면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인상깊었던 장면이 없어요.
주인공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더더욱 큰 문제점은 그런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술 트릭을 금방 눈치챌 정도로 반전이 뻔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범인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서술트릭을 사용한
소설이나 게임은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 소설이나 게임은 대부분 범인 시점의 이야기를 컷씬 수준으로 짧게 보여주죠.

하지만, EVE의 시스템은 범인의 하루 종일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스네이크가 하루 종일 친구들이랑 대화도 안 하고 다니고, 
알 만한 사람들 다 피해 다니고, 스네이크 본명을 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안 들키겠습니까?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반전이 눈치채기 어려워야만 좋은 반전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아니에요.
왜냐면 이 게임은 복선을 적극적으로 깔아서 그 트릭을 추리해 내도록 한 게 아니라
너무 소극적으로 줄거리를 쓰다 보니 범인을 알 게 된 케이스니까요.

꼭 반전이 좋아야 좋은 게임인 것도 아닙니다.
반전이 미흡하더라도 다른 요소가 좋아서 좋은 게임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이 게임은 아니에요.
왜냐면 이 게임의 반전은 캐릭터, 스토리, 시스템을 전부 희생시켜 가면서
반전 하나에 몰빵한 게임이니까요.
그런 반전이 망한 겁니다. 게임 전체가 망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에요.

다른 문제점도 많이 지적되는 게임이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이 부분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EVE 시리즈 시스템에 적합한 트릭이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어이없는 장면을 하나 소개해 드리면
바로 돌고래로 범인을 추리하는 장면입니다.

'돌고래야, 범인이 누구니?'
'뀨뀨'

그리고 고등학생이 컴퓨터로 돌고래 초음파를 분석해서 범인을 찾아내죠.
코난한테 마취 당하거나 축구공으로 쳐 맞아도 할 말없는 추리입니다.
임팩트가 대단했는지 많은 분들이 이 장면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이후 EVE The Lost one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발매되었고,
THE LOST ONE Last chapter of EVE이라는 이름으로 윈도우에도 이식이 되었습니다.
후반부 마리나 스토리도 추가되는 등, 변경 요소가 조금 있는 이식판이었죠.

특이하게도 제 소장품 중에서 이것만 없어졌습니다.
EVE 시리즈 다른 거 다 있는데 이것만 없어졌어요.
진짜로 LOST ONE이 돼 버린 겁니다.
이번 리뷰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정말 싫어하는 DMM에서 다운로드판을 새로 샀습니다.



제가 이 게임을 워낙 옛날에 했기 때문에 제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DMM에서 받은 다운로드판이
옛날 윈도우판보다 불편해진 것 같습니다.
강제 전체화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중대한 문제는 게임이 멈춰버린다는 겁니다.
플레이 도중에 스네이크 스토리는 거의 다 끝났는데
쿄코의 스토리가 진행이 더 이상 안 되는 버그에 걸렸어요.

인터넷에 정보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쓰레기 게임을 DMM에서까지 구매한 사람이 얼마없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진행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냥 포기했습니다.
이딴 게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를 외화유출범이라고 욕해도 받아 들이겠습니다. 


근데 저를 더 짜증나게 했던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게임이 진행이 안 되고 멈춰서 쌩돈 날렸는데 그게 짜증나는 포인트가 아니었어요.
정말 짜증났던 건 바로 조작성이었습니다.

이 리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마우스 왼쪽 클릭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다음 대사를 진행시켜주고, 선택지를 선택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굳이 에로게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근데 이 게임에서는 그런 당연한 상식이 안 먹혀요.
마우스 왼쪽 클릭을 누르면 이전 대화 로그가 떠요.

다음 대사를 위해 왼쪽 클릭을 하면? 로그가 뜹니다.
선택지 위에 커서를 가져다 놓고 왼쪽 클릭을 하면? 로그가 뜹니다.



화면 가운데에 MENU라고 적힌 거 보이시죠?
저걸 클릭하면 메뉴창이 뜰까요?
아니에요. 로그가 떠요.



맵 화면에서 이동할 곳으로 커서를 가져간 후
왼쪽 클릭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로그가 아니라 그냥 그 장소로 잘 이동합니다.
이번에도 로그가 뜨면 너무 일관적이라서 
마치 게임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일까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우스 왼쪽 클릭이 먹히지 않는 조작 때문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제가 <REVIVE... ~소생~>을 리뷰할 때 이런 문제점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게임들이 콘솔 게임을 이식하면서 버튼을 아무 생각없이 이식했다고요.

그 때, 저는 '한참 옛날 게임에나 있었고 
요즘은 해결된 문제를 굳이 욕해서 뭐하겠습니까.'라고 얘기했었는데
그 문제가 2021년도에 인터넷에서 팔고 있는 게임에 있으면 어떡합니까?

아무튼 다운로드판은 절대 사지 마세요. 
The Lost One 자체를 플레이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제 말을 안 듣고 플레이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하지만, DMM에서는 절대 사지 마세요. 
안 그래도 쓰레기 게임인데 더더욱 폐기물을 첨가한 느낌입니다.
어디서 어떻게든 CD를 구하던지 하세요.
 
 

총평하자면, 제목에는 EVE의 이름을 걸어 놓고
정작 게임은 반EVE의 길로 미친듯이 달려가는 게임입니다.
전작의 장점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어요.

좋게 말하면 검증된 명작의 후광을 거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위대한 명작의 부스러기조차 제대로 주워먹지 못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나쁘게 말하고 싶네요. 욕도 좀 섞고 싶고요.

그나마 있는 이 게임의 가치라면, 이후 EVE 시리즈는 어떤 쓸데없는 짓을 하더라도
주인공만큼은 코지로와 마리나로 해야 한다는 법칙을 정립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외에는 콩알만큼의 가치도 인정할 수 없네요.

댓글 2개:

  1. 기껏 이브에러에서 캐릭터들 잘 뽑아놓고 주인공을 변경하려 했다니 정말로 망한게 다행이네요.
    여담이지만 역시 백개만님 리뷰는 까는(?)바이브글이 개인적으론 더 재밌는거 같습니다 리뷰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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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헤헤//
    시나리오 작가도 나간 마당에 시리즈 두 번째만에 주인공을 변경하려 하다니
    대단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저는 도전정신에 너무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라서
    이런 무모함에 왠지 끌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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