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일요일

리뷰 : 에덴의 향기(1996/6/1,Jast)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JAST에서 발매한 <에덴의 향기>라는 게임입니다.
미소녀 게임 업계의 조상님이나 다름 없는 JAST가
이미 몰락하여 회생 불가능 수준이었던 96년도에 발매한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죠라는 이름의 탐정입니다.
주인공이 키류인 가문이라는 부유한 집안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의뢰를 받아 
조사하던 중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게 이 게임의 스토리죠.



게임 내에서 볼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도입니다.



이름을 클릭하면 캐릭터의 개인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가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은 큰 도움이 됩니다.
다만, 관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게임은 태생부터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키류인 가문의 가계도가 조부-부모-손자의 3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산 상속과 관련된 추리물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이죠.
하지만, 에로게에서는 금기와 다름없는 구성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나이와 스토리 구성이 애매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괭이갈매기 울 적에>를 들어봅시다.
그 게임 역시 3대가 등장하죠.

여러 미스터리가 교차하는 게임이지만 유산 상속 문제만 본다면,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부모 세대 뿐으로
손자 세대 캐릭터들은 딱히 상속에 대해 큰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 <괭이갈매기 울 적에>가 유산에 관련된
음모와 암투 위주로 스토리가 진행되었다면 
손자 세대 캐릭터들은 스토리의 뒷편으로 밀려났겠죠. 

이처럼 에덴의 향기도 유산 상속을 소재로 한다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들의 연령대가 확 올라가게 됩니다.
<괭이갈매기 울 적에>같은 경우는 나이 든 캐릭터들도 비교적 젊게 디자인되었고, 
에로게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근데, 에덴의 향기는 에로게잖아요.



이런 캐릭터들의 유산 상속 문제에 관심있을 에로게 유저가 어디있습니까?
손자 세대들은 젊고 이쁘게 디자인되어 있지만 
초반에 중심 소재에서 빗겨나 있을 수밖에 없죠.



주인공의 조사 대상인 이와나미 신(35세)입니다.
키류인 가문 전 당주의 사생아를 사칭하여 유산을 노리고 있죠.
나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런 캐릭터마저
아저씨로 설정해버렸군요.
솔직히 이런 아저씨가 사칭이든 아니든 별 관심이 안 생겨요.

유산 상속을 소재로 한 에로게로는 
대표적으로 실키즈의 <여계가족> 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
<여계가족 ~음모~>에서는 재벌 영감이 죽었는데, 
상속인인 자녀들이 30도 안 된 젊은 여성들뿐이죠.
물론, 비현실적입니다. 근데 이렇게 설정을 안 하면 에로게로서 그림이 안 나와요.


다시 말해, 에덴의 향기의 기본 소재는 
정통 추리물에서는 자주 쓰이는 소재이지만 에로게에서 쉽게 쓰일 소재가 아닌데, 
Jast에서는 그런 고민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에로게에서 이런 소재를 활용하고 싶었다면,
단일 사건 게임으로서 발매될 것이 아니라 
옴니버스 탐정물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어야 해요.

에로게 소재로서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하면 이 게임은 단순한 에로게가 아니라
스토리 위주의 성인 취향 정통 추리물을 지향한 게임일 수도 있겠죠.
제작사가 Jast만 아니었다면 그런 기대를 잠시라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토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개판입니다.
정통 추리물로서의 요소가 전혀 안 보이는 건 아니에요.

범인 체포 장면에서 관련인물 모두를 모아 놓고,
동기나 알리바이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은 꽤나 그럴듯한 장면입니다.
동기는 모두에게 있고, 알리바이는 모두에게 없으니
동기와 알리바이로는 범인을 추적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까요?



마지막에 범인과 동기에 대한 선택지가 플레이어에게 주어 집니다.
진범을 맞추면 범인은 이렇게 들통납니다.

"범인의 방에서 이런 병을 찾아냈습니다."
"그 독약은 제 것이 아니에요."
"이 병이 독약병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진부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추리물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결말이죠.
말 실수 안 했으면 뭘로 잡았을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런 방식으로 범인은 체포되고 사건은 해결됩니다.


근데, 그렇다면 범인을 틀렸을 경우에는 어떤 전개가 될까요?
살펴봅시다.

"범인의 방에서 이런 병을 찾아냈습니다."
"그 독약은 제 것이 아니에요."
"이 병이 독약병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진짜입니다. 진짜로 이런 대사 후에 탐정이 지목한 사람 아무나를 
경찰이 끌고 가는 엔딩이에요. 
범인 선택지가 열두 개가 있는데 열두 명이 다 똑같은 방식으로 잡혀갑니다.

이게 무슨 범인찾기입니까? 
범인뿐만이 아니라 지목된 모두가 그걸 독약병이라고 하잖아요.
그 병이 누가 봐도 독약병처럼 생겼나 보죠.



범인 지목을 잘 못하면 마지막 장면으로 범인이 
'사실 내가 죽였어'라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다음 플레이 때 정확히 범인을 지목하면 됩니다.

범인은 첫번째 피해자의 후처인 유리입니다.
첫번째 피해자는 죽은 전처에만 관심을 갖고,
후처인 유리는 그냥 애들이나 봐주는 사람정도로 생각했죠.



심지어 전처를 흑마술적으로 부활시킬 계획까지 세우고 있습니다.
관을 열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부활시킨다는 미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유리가 
순간 빡쳐서 죽여 버린 것이 사건의 진상입니다.


초반의 핵심 화두였던 유산 상속문제는 사라져 버렸죠.
유산 상속 때문에 외부 조직도 개입하고, 총싸움도 하고 했지만
살인사건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겁니다.

사실 이런 소재 전환은 추리물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입니다.
경찰이 표면적인 유산 상속에 집착해서 사건 수사를 하는 동안
탐정은 알려지지 않은 이면의 가능성을 파헤쳐 사건을 해결하는 구성이죠.

문제는 이러한 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점입니다.
탐정의 수사 과정을 통해 플레이어가 유산 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소재로
주의가 집중되도록 복선을 깔아 뒀어야죠.
부활에 관련된 오컬트 계획서나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미스터리한 방정도는
주인공이 진작에 발견해서 플레이어의 주의를 미리 그 쪽으로 돌렸다면 좋았을 겁니다.

동기가 마지막에 갑자기 밝혀지는 추리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시리즈의 일부 에피소드가 그런 면이 있죠.
하지만 그 만화는 동기는 드라마의 피날레일 뿐이고
전개의 중심 소재는 트릭과 논리를 통한 범인찾기에 있습니다.
에덴의 향기는 그마저도 아니고요. 뭘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게임의 결말은 유산상속에 관련된 사건 도중에 외계인이 갑자기 등장해서 
레이저 쏴서 살인했다는 결말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과장된 비유지만, 제 관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네요.



총평하자면, '시작, 중간, 끝' 모든 부분에서 좋았던 점이라고는 없는 게임입니다.
이미 몰락해서 남은 역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Jast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임이었죠.

사실 에로게 업계에서 이 정도의 망작은 꽤 많습니다.
21세기에 발매된 게임 중에서도 이런 게임이 몇 가지 생각이 납니다.
25년 전에 진작에 인기 없어서 묻힌 게임을
굳이 이렇게까지 욕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하네요.

예전에 Jast사를 리뷰할 때는 별 할 말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리뷰를 스킵했는데
막상 작정하고 파보니까 똥이 한 무더기는 나온 게임이었습니다.
남은 건 욕하는 재미뿐이었네요.

댓글 2개:

  1. 아.. 지뢰작이었나 보군요 ㅠㅠ 뭔가 cg만 봤을때 괜찮은(?) 탐정물인가 싶었서 궁금했는데 워낙 옛날게임인지라 정보나 리뷰찾기가 쉽지않아서 리뷰를 부탁드려본건데 왠지 죄송스러워지네요 ㅠㅜ

    리뷰보고나서 새삼느끼는거지만 역시 전체적인 완성도가 아니라 한두가지 지엽적인 요소에 혹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건 뭐 pc98시리즈가 아니라 최근에 나오는 게임들도 해당하지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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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헤헤//

    전학생이나 퓨어2처럼 까는 재미로 게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지뢰작을 신청하셔도 별 상관없습니다.

    게임에 대해 할 말이 많냐, 적냐가 중요한데
    생각보다 할 말이 많은 게임이라서 다행이었습니다.
    도저히 할 말을 짜낼 수도 없는 정도라면 제가 리뷰를 거절하니
    부담없이 신청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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