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약 20년 전, 제가 <라임색 전기담>을 플레이하고 내렸던 평가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분은 파워레인저 무시하냐고 그러더군요.
제가 일본의 슈퍼전대 시리즈를 많이 보진 않았고,
제대로 본 건 국내에서 <파워레인저 SPD>라는 이름으로 방영했던
<특수전대 데카레인저>뿐입니다.
단순히 핑크하고 옐로가 이뻐서 봤던 건데,
예상 외로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이건 라임색 전기담을 플레이하고 평가를 내렸던 이후에나 봤던 겁니다.
저 평가에서의 파워레인저는 KBS에서 <무적파워레인저>라는 이름으로 방영했던
미국의 <마이티 모핀 파워레인저>인데,
지금 저걸 다시 본다면 오히려 재평가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린 나이에 봤을 때는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라임색 전기담은
어릴 적보다도 더 어릴 적에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유치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게임인 겁니다.
다른 엘프 사의 게임들은 적어도 두 번 이상은 플레이해 봤지만,
라임색 시리즈만은 과거에 딱 한 번 플레이했을 뿐입니다.
제가 <METAL EYE2>를 리뷰할 때 그 게임에 대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하면, 엘프 사의 PC-98 게임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하면'이나 'PC-98 게임 중' 같은 수식어를 붙였던 이유가
바로 제 머리 속에 이 라임색 전기담이 있었기 때문이죠.
라임색 전기담이 있는 이상 <METAL EYE2>에
함부로 '엘프 사 게임 중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릴 순 없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보는 게임입니다.
과연 이 게임이 <METAL EYE2>를 넘어 엘프 사 최악의 게임이 맞는지,
20년만에 한 번 검증을 해 보겠습니다.
라임색 전기담은 그 소재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바로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쿠라대전>을 많이 참고했고, <사쿠라대전>을 쓴 작가까지 데려왔다고 하는데
제가 <사쿠라대전> 시리즈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유사한지는 잘 모르겠군요.
러시아와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파워레인저를 떠올렸는지는 위의 CG를 보면 아실 겁니다.
이런 상황인 줄 모르고 부임해서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는 참교육자죠.
이 게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문제점은
아무튼, 주인공과 여학생들이 날아다니는 군함을 타고
러시아와 싸워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짧고, 얕고, 부실한 묘사입니다.
이 게임에는 13개 정도되는 에피소드가 있고,
각 에피소드마다 중심이 되는 캐릭터가 있습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특정 캐릭터의 고민, 갈등, 각성 등을 다루고 있죠.
근데 스토리가 지나치게 부실하게 전개됩니다.
뭔가 비밀이 있나 보다 하면 금세 비밀이 밝혀지고,
뭔가 고민이 있나 보다 하면 금방 고민이 해결되어 있습니다.
캐릭터의 고뇌를 그리는데 3분, 갈등하는데 3분, 해결하는데 3분,
그리고 다음이야기 예고편 보여주고 이런 식이에요.
위기에 빠진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 자폭을 합니다.
러시아에서 보내 오는 적들입니다.
이 게임은 단순한 비주얼 노벨은 아니고
주인공에게 그녀들의 지휘를 맡기고 장렬하게 전사하죠.
이 장면에 대한 제 감상은 이렇습니다.
'근데 너 누군데?'
저 캐릭터는 주인공의 성장에 도움을 줬던 멘토도 아니었고,
부대원들과 각별한 관계라는 묘사도 별로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대원 중 한 명과는 그런 대로 중요한 관계가 있었지만
살아 생전에는 그 묘사도 부실했죠.
그냥 주인공하고 대화 세 번 정도 했을 뿐인 캐릭터가
뒷일은 맡길게 하더니 갑자기 터져 버린 거에요.
뭔가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 전후로 감정의 고조가 있어야 플레이어가 몰입이 되는데,
그걸 다 생략해 버렸어요.
스토리가 무슨 요약집 수준입니다.
그 와중에 썰렁한 개그는 쓸데없이 많이도 넣어놨죠.
아주 가끔 뭔가 보여 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별 활약이 없습니다.
수많은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고 퇴장에 이르기까지
대사 다섯 마디정도 하고 끝이에요. 진짜입니다.
적이 쳐들어 오면 주인공 일행은 위기를 맞이하죠.
왜 위기냐고요? 스토리상 위기가 필요하니까 위기인 겁니다.
아니, 저번 에피소드에서 이미 이겼던 적이 쳐들어 온 게 무슨 위기입니까?
적들이 새로운 기술을 가져 왔다거나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거나 하는 것도 없어요.
고작 대사 다섯 마디하는 적이 무슨 새로운 전략입니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위기에요. 딱히 위기인 이유도 없이 처절합니다.
이런 위기에 어떻게 긴장감을 느끼겠습니까?
아무튼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각성입니다.
에피소드의 주역 캐릭터가 각성해서 새로운 힘을 얻는 거죠.
하지만, 이 각성도 전후 사정이 없습니다.
그냥 새로운 힘이 필요한 때가 왔으니 각성하는 거에요.
친구가 위기에 빠졌으니 우정의 힘으로 각성한다는데,
이것만으로도 이미 유치한 전개입니다.
근데, 우정에 대한 묘사라도 제대로 이루졌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얘네들이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간절한지 의문일 정도에요.
다시 말해, 위기를 묘사하는 것도 부실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인 각성을 묘사하는 것도 부실하고,
그 각성의 원인인 우정을 묘사하는 것도 부실하고 총체적 부실입니다.
제가 옛날에 이 게임을 비판했던 주요 이유는 바로 우정으로 인한 각성 때문이었죠.
애들용 만화도 아니고, 성인 게임에서 밑도 끝도 없는 우정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게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플레이해 보니,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전개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못했던 묘사 탓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전투를 게임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전투가 괜찮았더라면 부실한 스토리를 어느 정도 커버해 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전투 시스템은 스토리를 커버하기는커녕,
이 게임의 평가를 하락시키는 쌍두마차입니다.
뭐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투 시스템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색깔 상성에 따라 캐릭터들을 군함 주변에 배치하는 게 끝이에요.
아이템도 없고, 경험치도 없고, 레벨도 없고, 스킬도 없고, 이동도 없어요.
그냥 색맹 테스트입니다.
이 시스템의 어디를 수정해야 이게 재미있어질까 짐작이 안 가는 시간낭비입니다.
다행히도 한 번 클리어하면 2회차 플레이에서는 클리어한 전투를 스킵할 수 있는데
클리어 안 한 전투도 스킵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수업 과목을 선정하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캐릭터마다 잘하는 과목에서는 기분 좋게 수업을 듣고,
못하는 과목에서는 어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SD 캐릭터가 귀엽기는 한데,
아무 성장 없이 똑같은 장면만 계속 반복돼서
이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각 캐릭터의 호감도와 엔딩에 영향을 주긴 하는데,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총평하자면, 제가 한창 에로게를 좋아했을 때 엘프 사는 몰락한 회사였으나,
'소년만화, 러브 코미디에 H씬만 첨가했을 뿐인 에로게'가 아닌
농후하고 질척질척한 어른의 이야기를 만드는 회사였으며,
당대의 대세였던 비주얼 노벨이 아닌
무모하지만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는 회사였습니다.
라임색 전기담은 제 모든 기대를 배신하는 게임이었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는 이 게임을 재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더 심각한 수준의 쓰레기 게임이었어요.
근데 이번에 막상 플레이해 보니
캐릭터는 제 기억보다 괜찮았고,
스토리는 제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는 나았고,
전투도 제 기억보다는 전략성이 있었습니다.
다시 플레이하기 싫은 최악의 게임은 맞지만
그 때 맹비난했던 것만큼 최악 중의 최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이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실망을 정말 많이 해서
좀 더 가혹한 평가를 내렸던 것 같아요.
그리하여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엘프 사 최악의 게임은 <METAL EYE2>입니다.
라임색 전기담은 <METAL EYE2>보다 낫습니다.
파워레인저보다는 못하네요.
메탈아이2도 다시 하시면 또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허헛
답글삭제feveriot//
답글삭제메탈아이2는 두 번 플레이해 보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재평가는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도 먼훗날 제 게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져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