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CURSE OF CASTLE>은 엘프가 제작한 게임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낮은 게임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너무 인지도가 없는 나머지 인터넷에도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마로의 환자는 가텐계3>에 올라온 역대 엘프 게임 목록에도
CURSE OF CASTLE이라는 게임은 없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올라와 있는 엘프 사 게임 목록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엘프 게임이 아니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증거1. 게임 수준이 너무 떨어집니다.
CURSE OF CASTLE이 발매연도는 1991년입니다.
1991년이면 <드래곤나이트3>가 발매된 해입니다.
하지만 게임 클래스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그래픽의 퀄리티는 둘째치고 CG 분량 자체가 너무 적습니다.
제대로 된 CG는 단 네 장뿐입니다.
1989년도의 처녀작 <두근두근 셔터 찬스>부터 1991년도에 이르기까지
엘프 사는 이토록 CG 분량이 적은 게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증거2. 에로게가 아닙니다.
CG 네 장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듯이 에로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 한 게임을 전연령판과 성인판을 따로 발매한 예가 몇 개 있기는 합니다만
전혀 에로게가 아닌 게임을 발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증거3.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PC-98 게임 중에서는, 유명한 게임이 아니라면 상당 수의 게임이
정보가 없긴 합니다.
하지만, 1991년도는 이미 엘프는 궤도에 올라 어느 정도 잘 나가고 있을 때입니다.
일본 사이트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상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보면
역시 CURSE OF CASTLE은 엘프 사의 게임이 아닙니다.
게임을 시작했을 때 바로 나오는 화면입니다.
KAO라는 회사의 로고가 뜹니다.
역시, 이 게임은 엘프 사의 게임이 아닌가 봅니다.
그 다음으로 이 게임의 타이틀이 뜹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익숙한 엘프 사의 로고와 함께 '제작 주식회사 엘프'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저를 오랫동안 의문에 빠뜨린 주범입니다.
엘프 사의 게임이 아니라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게임 내에 명백하게 엘프 사가 제작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인터넷에는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 사이트에서는 CURSE OF CASTLE과 엘프의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서양권 PC-98 사이트에서는 이 게임이 엘프 사 게임이 맞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사이트 역시 그 외 별다른 설명이 없어 정확도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이 문제에 대해 조사를 거듭해도 의문은 밝혀지지 않았고
저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가설1. 엘프 사가 제작했고 KAO 사가 유통 혹은 퍼블리싱했다?
게임에서 나온 KAO 사 로고와 제작 엘프 사라는 장면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에로게가 아닌 이유는 납득할 수 있지만 퀄리티가 너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유명 회사인 엘프 사는 단독으로 유통할 능력이 충분한데
KAO 사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게임 회사와 협력할 이유가 있을까요?
가설2. KAO 사는 엘프의 자회사이다?
1991년도의 게임인 <FOXY2> 리뷰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기는 엘프 게임의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200라인에서 400라인으로, PC-88 범용에서 PC-98 단독 게임으로
게임 스타일이 변화한 시기입니다.
이 변화와 더불어 엘프 사는 에로게가 아닌 일반 게임으로의 진입을 시도했고
그것을 위한 자회사를 설립했다는 가설입니다.
그리고 CURSE OF CASTLE은 실험작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KAO는 그대로 묻혀버렸습니다.
엘프 게임치고는 수준이 낮은 이유도 에로게가 아닌 이유도
정보가 없는 이유도 전부 설명이 되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이 가설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엘프 사의 진짜 자회사인 실키즈 사의 게임만 봐도
실키즈 사의 로고만 나올 뿐 '제작 주식회사 엘프' 같은 로고는 넣지 않습니다.
게다가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옐로 피그'나 '바나나 슈-슈' 같은
엘프 사의 유명하지 않은 자회사도 정확히 적혀 있습니다.
KAO 사만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어져 버렸습니다.
지금은 대충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정답은 가설1입니다. 엘프 사가 제작했고 KAO 사가 유통했습니다.
제가 착각했던 부분은 KAO 사가 듣도 보도 못한 게임 회사라는 점이었습니다.
KAO 사의 홈페이지입니다.
그 정체는 화왕 주식회사라는 곳인데 무려 1887년(!), 고종 24년에 설립된 회사입니다.
일본 화장실용품, 세제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입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플로피 디스크 사업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KAO는 <화왕 리얼 소프트팩>이라는
플로피 디스크 10장 정도의 소프트를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화왕 리얼 소프트팩>에는
체험판같은 게임들이 들어있었습니다만 점차 신작 게임이 통째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엘프 사에서 제작한 CURSE OF CASTLE이었던 것입니다.
<화왕 리얼 소프트팩>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은 <루트 246 살인 안내>라는 게임입니다.
당시 유명 제작사 페어리테일 사에서 만든 게임입니다.
페어리테일 사는 최근까지도 게임을 내고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90년도 초에는 엄청난 회사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중엽까지는 욕을 먹으면서도 인지도가 꽤 있었는데
피아캐롯 시리즈, 캔버스 시리즈의 F&C로 알려져 있습니다.
F&C의 F가 바로 페어리테일입니다.
어쨌든 엘프 사나 페어리테일 사같은 당시 유명한 회사들이
왜 <화왕 리얼 소프트팩>에 참가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CURSE OF CASTLE은 이래저래 미스테리한 게임입니다.
게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달의 세계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습니다.
표면은 '화왕'이 다스리고 있고, 지하는 '아왕'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보물 목록입니다.
'달의 펜던트', '비밀의 플로피 디스크', '진실의 안경', '왕녀의 구출', '달의 열쇠'입니다.
보물 하나 당 하나의 스테이지입니다.
어떤 보물을 찾을지 선택하면 되는데
무엇을 선택하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스토리도 똑같고 난이도도 똑같고
대사도 토시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다섯 스테이지를 모두 깨도 통합 엔딩조차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게임을 다섯 번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화왕은 용사 비올라에게 지하로 쳐들어가서 보물을 되찾아 올 것을 명령합니다.
게임은 슬롯머신 같은 시스템입니다.
미로에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주인공이 시작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면 갑자기 슬롯머신처럼
여러 가지 미로 모양이 회전합니다.
엔터키를 눌러 하나의 길을 선택합니다.
좌, 우키를 이용해 선택한 미로를 회전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와 싸우기 시작하면 공격 강도가 슬롯머신처럼 나옵니다.
'痛(통)'이라는 한자가 클 수록 더 큰 대미지를 입힙니다.
이런 식으로 미로를 만들어 가다 보면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미로는 지하 5층까지 있습니다.
아이템도 있습니다.
'허브'는 회복 아이템입니다. 전투중에 HP가 0이 되면 자동으로 회복됩니다.
'로리에'는 계단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바이오비즈'는 보물상자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파이프스루'는 막힌 벽을 뚫을 수 있습니다.
'8X4'는 한동안 몬스터들과 조우하지 않습니다.
난이도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계단을 찾았다고 아무 생각없이 내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한 번 내려간 계단은 다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 층의 미로를 가능한한 샅샅이 수색하면서 레벨업과 무기, 방어구들을 찾으면
난이도가 엄청 쉽습니다.
최종보스 아왕입니다. 별 거 없습니다.
주인공에게 털리고 나면 용서해 달라고 사정합니다.
선택지가 나오는데 용서 안한다를 선택하면 계속 용서해달라고 사정합니다.
용서하긴 싫지만 용서 안한다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뭐, 게임이 내용이 없어서 이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총평하자면, 별 거 없는 게임입니다.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로서도 경쟁력이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됩니다.
플로피 디스크 한장 게임의 한계인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엘프의 시험작이었을까요?
어쩌면 엘프 사가 KAO사에 게임을 주기 싫었던 걸까요?
그런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