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에 엘프 사에서는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에로게를 발매합니다.
98년도에 휴먼이라는 회사에서 발매한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시리즈의 새로운 속편을 발매한 거죠.
예전에 한 번 이 게임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런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는 나중 리뷰에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 발매되기 전까지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게임에 대해 잘 몰랐죠.
엘프 사에서 저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는지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에는
<미카구라 소녀탐정단>과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
두 게임의 윈도우 이식판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리뷰하는 게임은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지만
휴먼 사에서 발매한 PS1용 게임이 아니라 엘프 사에서 동봉한 윈도우용 게임이고,
PS1용 게임에 대해서는 주요 변경점만을 언급할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은 소문난 명탐정 미카구라 토키토와
그의 조수들인 카노세 토모에, 쿠미야마 시게노, 히가키 치즈루라는
세 소녀의 활약을 그린 옴니버스 탐정물입니다.
플레이어가 주로 조작하는 것은 여조수 셋이고,
미카구라는 해결편 쯤에 등장해서 폼 잡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토리만 봤을 때는 역사에 남을 수준의 게임은 아니었으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스템인 '트리거 시스템'으로 유명한 게임이었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우선 트리거 시스템에 대해 분석해 보기로 하고,
스토리나 캐릭터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 보도록 하죠.
오른쪽에 보이는 아이콘을 선택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외 장소 이동이나, 특정 장소에서 포인트 클릭 시스템 등이 있지만
그다지 중요한 점은 아닙니다.
대화창 위에 방아쇠 모양의 '추리 트리거'가 표시됩니다.
파란색의 대사 중에서 수상하거나 좀 더 조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추리 트리거를 클릭하면 되는 겁니다.
정답이라면 '탕'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추리 포인트가 올라가고,
오답이라면 '푸슉'하는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오며 총알만 낭비하게 됩니다.
옛날 게임에서 대사 하나하나에 대해 캐묻거나 모순을 지적하는 등의 행위는
오로지 게임 캐릭터들의 몫이었습니다.
사소한 것까지 지적해야 하다 보니,
게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장소가 많고, 그만큼 대사량도 많습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들을 조종하면서도
장소 이동이나 범인 선택 등의 제한적인 플레이만 가능했죠.
중요한 부분인 탐정의 솜씨 파트에서는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게임은 그 행위를 플레이어가 직접 할 수 있도록 만든 겁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시스템이었죠.
하지만,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이 게임의 존재조차 모르는,
수많은 분들에게도 이 트리거 시스템은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바로, <역전재판> 시리즈와 <단간론파> 시리즈에서 사용된 방식이기 때문이죠.
이 시스템의 원조가 바로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두 게임의 제작진이 이 시스템의 뿌리는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에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전재판>, <단간론파> 시리즈와 이 게임은 상당히 차이점이 많은데,
대표적인 차이점은 이 게임은 재판이 아닌 수사과정이 메인이라는 점입니다.
범인을 밝히는 해결편에서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미카구라 탐정이 범인을 추리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죠.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에서는 선택지를 통한 추리가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수사 과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점은 두 게임의 진행 방식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역전재판>, <단간론파> 시리즈는
주로 고의 혹은 무의식적으로 위증을 하는 범인, 증인들의 수상한 증언에
이의를 제기하고 몰아 붙이면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하죠.
반면에,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은 모순되지 않고, 이상하지도 않은 평범한 증언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못 들어본 이름이나 처음 듣는 이야기, 그리고 수사에 필요해서 기억해야 할 이야기같은
비교적 사소한 이야기까지 지적을 해서 캐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형사가 말하는 "사망 추정시간은 8시에서 10시 사이야." 같은 대사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대사지만 탐정이라면 기억해야 할 정보입니다.
그럼 쏴야 하죠.
또, "그녀는 저래 보여도, 애인한테는 친절해요." 같은 대사는 정말 사소한 증언이죠.
하지만,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완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럼 쏴야 하는 거에요.
방아쇠를 당긴 후에야 그 애인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는 시스템입니다.
확실한 모순을 잡아 내는 것보다 게임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게임을 그렇게 날림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에 일리가 있지만
한 번 진행이 막혀 버리면 답도 없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수많은 장소를 다시 다 돌아 보고, 수많은 대사들을 다시 살펴 봐야 합니다.
아무리 살펴 봐도 이상한 대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더니
원래 빈 방이었던 곳에서 누군가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증인이 스토리 진행에 따라 갑자기 다른 증언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역전재판>, <단간론파>에서는 모순을 찾아 내야하는 대사의 범위가 명확하게 제한되지만,
이 게임에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무슨 대사가 문제인지 열심히 고민했는데
사실 듣도 보도 못한, 갑자기 나타난 대사가 정답이었다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단번에 방아쇠를 당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증인 "주방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고 해."
탐정단 "약간의 소란?"
증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고 하는군."
탐정단 "그 이유가 뭐죠?"
이 대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주방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정보입니다.
이 게임의 논리대로라면 방아쇠를 당겨야 할 타이밍이죠.
근데 오답입니다.
굳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도 탐정이 알아서 캐묻거든요.
"비명을 질렀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답인 이유는 탐정이 알아서 캐묻기 때문이죠.
저 파란색 대사를 처음 본 상황에서는
저 대사가 오답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 대사 이후에 탐정의 대사를 들어야만 오답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역전재판>이나 <단간론파>에서는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일단 맨 처음부터 끝까지 추리해야 하는 대사 전체를 한 번 들려 줍니다.
근데 이 게임에는 그런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죠.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정말 의심스러운 대사가 아니라면
함부로 방아쇠를 당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총알을 꽤 넉넉하게 줬다는 점입니다.
화면 윗부분을 보면 추리 포인트는 16점, 남은 총알은 10발입니다.
정답을 맞추면 총알 한 발에 대체로 1~4포인트까지 올라가죠.
챕터 클리어까지 고작 4포인트 밖에 안 남았으니
최악의 경우에도 10발 중에서 6발은 틀려도 되는 겁니다.
운 좋으면 9번 틀려도 1발만에 클리어할 수도 있고요.
이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애매해도 한 번 쏴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가씨가 "새로 온 메이드도 파티 준비를 열심히 하는데 내가 쉴 수는 없어."라고 합니다.
새로 온 메이드가 대체 누구죠? 한 번도 못 만났는데요.
안 되겠습니다. 쏩시다.
오답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니, 그 메이드는 우리가 잠입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의 시스템은 다소 아쉽습니다.
총알 실수까지 전부 계산해서 채점한 다음에
S~D까지 등급을 매기고 서비스 CG를 보여주는 시스템이 생겼죠.
S등급을 맞기 위해서는 에피소드 내내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애초에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을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 디자인이 아니에요.
사소한 부분도 잡아 내야 하고, 애매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이 명확하게 보이는 게임이 아닙니다.
규정 횟수 이내에 모든 정보를 캐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이에요.
챕터 초반에 총알을 많이 낭비해서 후반에 쫄리기도 하고,
초반에 총알을 아낌으로써 후반에 여유있게 대처하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애매한 증언의 개수와 총알의 개수를 비교해 봤을 때,
총알이 많이 남아서 애매한 증언 전부에 쏴 볼 수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남은 총알을 운용하는 재미가 있는 게임인 겁니다.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은 99% S등급을 받을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S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한 번 클리어하고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해야 하는데
그건 그냥 기억력 테스트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안 했어요.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게임이고, 단점은 그 중에서 일부분에서만 드러날 뿐이죠.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만 보더라도 후대 게임들에 비하면
시스템 운용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보이는 게임입니다.
혁신적인 시스템이었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역전재판>에 넘겨줘야만 했죠.
물론 시스템 운용 탓만은 아니고, 운도 안 따르기도 했습니다.
시리즈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 영향도 컸을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역시 다음 리뷰에서 이야기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