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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7일 월요일

리뷰 : 키즈아토(1996/7/26, Lea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리프 비주얼 노벨 제2탄 <키즈아토>입니다.
PC-98과 윈도우즈판으로 96년도에 발매되었고
2002년에 그래픽을 새로이 하여 리뉴얼판이 발매되었으며,
2009년에 다시 그래픽을 갈아 엎고 리메이크되었습니다.



화면 전체를 덮는 텍스트, 선택지 방식의 멀티 엔딩 등
시스템 자체는 시즈쿠와 전혀 차이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오랫동안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던 주인공은
아버지가 사고사한 소식을 듣고 잠시 시골로 내려가게 됩니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네 자매와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되는데,
매일 밤마다 자기 몸속에 숨어있는 사악한 무언가의 유혹과 싸우는 꿈을 꾸게 됩니다.

꿈 이외에는 네 자매의 귀여움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시골 스토리입니다.
아버지의 사고사에 의문을 품은 형사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이외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네 자매 중 차녀 아즈사의 후배 카오리와 만난 주인공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쓰러진 주인공은 꿈을 꾸게 됩니다.
꿈의 내용은 자신이 괴물이 되어 행인 네 사람을 살해하고, 카오리를 습격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주인공은 TV 뉴스를 보는데,
꿈에서 본 장소에서 사람들이 정체 모를 괴물에게 살해당하고,
카오리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묘사 자체는 <시즈쿠>의 중2병에 비해 훨씬 깔끔해졌습니다.
여전히 시대에 비해서 깊은 묘사를 보여 주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혼자 망상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 내면에 존재하는 괴물의 속삭임이기 때문에 부담이 덜 되고,
주인공의 상황 자체가 많은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상냥한 누님스타일인 장녀 치즈루입니다.
제작진 공인의 위선자 캐릭터이지만
적어도 본편에서 나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고,
부모를 잃은 자매들을 잘 이끄는 책임감 있는 맏언니입니다.



스토리도 치즈루 루트가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괴물이 된 주인공을 향해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는 명대사가 있는데
2회차 이상의 플레이에서는 이 대사가
굉장히 많은 고민이 함축된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치즈루 루트는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대체로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스토리인데
이쪽이 가장 훌륭하다는 점은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 이후로 아즈사, 카에데, 하츠네 루트 순서로 진행되는데
스토리의 박력이 점점 떨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스토리상 중요한 정보를 각각의 스토리에 배분했는데,
이는 멀티엔딩 게임으로서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치즈루, 아즈사 루트에서 미스터리했던 떡밥의 거의 모든 게 벌써 다 밝혀져 버리고,
하츠네 루트쯤 가면 별 궁금한 것도 없습니다.
아쉬운 점이죠.


다만, 선택지 게임으로서 스토리를 예측하기 힘들게 한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쓸모없는 선택지가 많고, 
해피 엔딩으로 가는 난이도가 낮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공략집을 보고 플레이하지 않는다면 꽤 예측 불허의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차녀 아즈사의 스토리입니다.
수사 끝에 주인공과 아즈사는 카오리가 납치되었을만한 장소를 찾아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할 것인지 경찰에 신고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먼저, 경찰에 신고를 해 보았습니다.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는 야나가와라는 형사가 동행하게 됩니다.
맨션에서 카오리를 찾아내기는 했는데,
형사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는 바람에 
주인공과 아즈사까지 붙잡히게 된다는 배드엔딩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무기를 준비하는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근데, 아즈사가 무기따위는 필요없고 자신의 양 주먹을 믿으라고 합니다.
사실 주인공 가문은 특별한 가문으로 자매는 모두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즈사의 능력은 괴력같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전기물에서 이능력이라니 정말 든든한 무기입니다. 

이번에도 맨션에서 카오리를 찾아내게 되는데,
신고도 한 적도 없는데 현관에서 야나가와 형사가 등장합니다.
예상하기 어려운 사실은 아닙니다만, 야나가와 형사가 범인이었습니다.

방금 전에 신고한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때는 
갑자기 습격당해서 힘을 쓸 타이밍이 없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아즈사의 괴력을 발휘하여 적을 쓰러뜨릴 때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형사가 총을 쏘는 바람에
괴력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사망 엔딩이었습니다.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입니다.


사실, 예측 불허의 사례로 들기에 아즈사의 스토리는 적절치 못했습니다.
결말면에서 비판을 많이 받는 스토리죠.
카오리를 찾아 수사하는 장면까지는 정말 좋았습니다만
그 후로는 다소 허무했습니다. 해피엔딩도요.

이런 스토리가 결국 아즈사의 캐릭터까지 망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아즈사의 인기는 네 자매 중 최하위권입니다.
아즈사가 호쾌한 주먹질이라도 보여 줬더라면
이렇게까지 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은 왠지 주인공을 피하는 셋째 카에데의 스토리입니다.
마지막에는 카에데의 태도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고
주인공과 카에데는 연인이 됩니다.
자초지종을 지켜 보고 있던 장녀 치즈루는
주인공이 내면에 있는 괴물을 제어할 수 있을지 테스트를 하기로 합니다.
주인공, 카에데, 치즈루는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올라갑니다.



주인공이 괴물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치즈루가 다시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는 명대사를 꺼내 듭니다.
명대사도 한, 두 번 볼때나 좋지 카에데 루트까지 와서 저 대사를 꺼내니
유행어로 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약간 거부감이 듭니다.

아무튼, 치즈루의 공격에 다시 피가 튀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숱한 배드엔딩을 봐 왔던 플레이어는 또 배드엔딩인가 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근데, 상처가 얕아서 아직 안 죽었습니다.

치즈루는 다시 공격을 하는데 이번엔 사이에 카에데가 끼어듭니다.
괴물이 된 주인공은 가까스로 이성을 회복하여 반격하고
치즈루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만듬으로써 카에데를 보호하는데 성공합니다.
드디어 해피엔딩을 보게 되는구나하고 감동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잠깐의 이성일 뿐이었고 괴물이 된 주인공은
카에데와 치즈루를 남겨놓고 떠난다는 배드엔딩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멀티 엔딩을 만들기 쉽지 않은 만화나 영화, 소설과는 다른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만의 특색입니다.
다른 매체에서는 주요 인물이 어떤 위기에 빠지더라도, 어떤 강대한 적을 만나더라도
결국에는 주인공이 죽지 않고 어떻게는 위기를 헤쳐나오리라고
예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장르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고, 시리즈의 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 권짜리 소설이라면 몇 페이지가 남아있는지
만화책이라면 몇 권 남아있는지, 영화라면 상영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보고
곧 결말이라는 걸 예측할 수도 있죠.

하지만, 비주얼 노벨에서는 그런 예측에서 자유롭게 스토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아즈사 스토리처럼 뭔가 보여주는가 했는데 허무하게 죽어 버릴 수도 있고,
카에데 스토리처럼 배드엔딩일 줄 알았다가 해피엔딩일 줄 알았다가를
반복하며 플레이어를 농락할 수도 있죠.

멀티엔딩 게임이다 보니 지금 진행되고 있는 스토리에서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대로 절망하게 될지 
플레이어는 손에 땀을 쥐고 지켜 보게 됩니다.

비주얼 노벨의 초기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키즈아토에서는 이런 밀당을 정말 잘 이용했습니다.
<시즈쿠>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시즈쿠>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비교적 난이도가 쉬웠습니다.
키즈아토 쪽이 훨씬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치즈루나 카에데의 해피엔딩은 한 번에 볼 수 없도록
시스템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정해진 배드엔딩을 봐야 해피엔딩을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새로운 선택지나 다른 루트에 대해서는
엔딩곡 이후에 각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플레이어에게 힌트를 주게 됩니다.
이 부분도 <시즈쿠>보다 세련된 방식입니다.

<시즈쿠>에서는 캐릭터가 등장하여 '13개의 엔딩이 있으니까 확인해 봐.'라고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에, 키즈아토에서는 간접적으로 알려주게 됩니다.
마지막에 동료 형사가 등장하여 '야나가와, 요즘 무슨 고민이 있어?'하면서 
야나가와 시점의 루트가 열리게 됩니다.
하츠네가 등장해서 '내 방에 불꽃놀이 세트가 있는데 같이 하러가면 안 돼?'라고 하며
하츠네 루트가 열리게 되죠.



귀엽고 착한 막내 하츠네입니다.
스토리는 가장 아쉬웠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복선은 앞의 세 명이 다 회수했고
굳이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스토리였습니다.
마무리도 뜬금없었고요.




2002년에 발매된 리뉴얼판입니다.
메인 스토리는 텍스트 상 자잘한 수정을 가했고, 
오마케 스토리는 표절 논란이 있던 스토리를 빼 버리고,
새로운 오마케 스토리를 집어 넣었습니다.

보이스가 들어있지 않다는 점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에 약간의 서술 트릭이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실제로 2009년 리뉴얼판을 처음 플레이한 사람 중에는 목소리만 듣고 
범인의 정체를 알아서 맥이 빠졌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맹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들쭉날쭉한 그래픽이었습니다.
원작은 발매년도가 96년도라는 걸 감안해도 좋은 그래픽이 아니었기 때문에
리뉴얼판에서 그 점을 해소해 줬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2009년 리뉴얼판이 나오기 전까지
2002년 리뉴얼판을 추천하시는 분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 했습니다.
모두들 차라리 96년도 판을 플레이하는 게 낫다고 하더라고요.

<시즈쿠>의 경우에는, 그래도 리메이크 판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죠.
이건 보이스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비판적일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픽 문제는 인정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CG도 많이 있었습니다.
추가된 장면도 여럿 있었고요.
보이스가 없던 점은 많이 아쉬웠지만요.



2002년판 텍스트와 CG를 기준으로 그래픽을 다시 한 번 수정한 2009년 리뉴얼판입니다.
그래픽에 대해서는 여전히 원작이 낫다 하시는 분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큰 불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치즈루씨의 귀여움도, 무서움도 2009년 리뉴얼판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는 대사를 여러 번 들어 왔지만
이번에야말로 살아남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카리스마입니다.



'보름 후'라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도 추가되었는데
분량이 상당하고 배드 엔딩 수도 많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편입니다.
원작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건 맞습니다.



총평하자면, <시즈쿠> 발매 이후, 고작 반 년만에 발매된 게임이지만
그 수준 차이가 적지 않은 높은 레벨의 게임입니다.
<시즈쿠>에서 미처 투입하지 못했던 여력을
키즈아토에 몽땅 쏟아 부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훌륭한 스토리, 잘 뽑힌 캐릭터, 충실한 사운드, 
비주얼 노벨 시스템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활용도,
그리고 멋진 리메이크까지 제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혼자 다 가진 게임인데
이걸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특히, 비주얼 노벨에 대한 구성은
1탄 <시즈쿠>를 제치고 장르의 완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입니다.
키즈아토가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게임으로 타입문의 <월희>가 꼽히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비주얼 노벨에 영감을 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워낙 오래된 게임이라서 이후에 나온 비슷한 게임이 더 플레이하기 수월하다는 분도 있고,
특히, 현재 시점에서는 차라리 <월희>를 플레이하는 게 낫다는 분도 있습니다.
<월희>도 명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부정할 수는 없네요.

키즈아토에는 키즈아토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대세에 맞춰 2002년 리뉴얼판은 빼고,
한국어 패치가 있는 96년판과
한국어 패치는 없지만 유려한 그래픽과 보이스가 있는 2009년 리뉴얼판을
추천하겠습니다.

2020년 7월 19일 일요일

리뷰 : 시즈쿠(1996/1/26, Lea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Leaf사의 비주얼 노벨 1탄 <시즈쿠>입니다.
1탄이라는 의미도 대단하지만,
색다른 분위기로 인해 게임 자체도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96년도에 PC-98판이 발매되었고 같은 해 윈도우용으로 이식되었으며,
2004년도에 CG를 갈아엎고, 보이스를 추가하여 리뉴얼판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도에 리뉴얼판의 인터페이스만 약간 수정하여
<키즈아토> 리메이크판에 동봉하여 판매되었습니다.

이중에 96년도의 윈도우판, 2004년도의 리뉴얼판은 한국어 패치가 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았던 게임입니다.

이에 관련하여, 저는 시즈쿠 리뉴얼판을 지인에게 추천했다가 
욕을 거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추천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게
한국어 패치가 된 게임들을 이것저것 살펴 보면서
이런 게임도 있다고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뿐입니다.
<크로스 채널>이나 <파르페 ~쇼콜라 second brew~>같은 
제가 강력 추천했던 게임들을 거르고
잠깐 언급하면서 넘어갔던 시즈쿠를 본인이 선택해서 플레이했는데 
이게 어떻게 제 탓입니까?

말리지 않았던 잘못은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시즈쿠를 플레이하고 사오리 루트 엔딩을 봤는데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더라고 말하더라고요.
공략집 보고 해서 배드엔딩도 안 봤을 테고,
사오리 해피엔딩은 원래 충격적인 장면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네가 과연 루리코 루트를 보더라도 계속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하고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너 한 번 당해 봐라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거죠.

며칠 뒤, 엄청 화내더라고요. 플레이 감상이 어땠는지 물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화내는 건 좀 아니죠. 제 잘못이 아니니까요.
비유하자면, 제가 여러 우량주를 많이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지인은 잠깐 언급된 개잡주를 몰래 산 거죠.
저는 그게 폭락할 걸 알면서도 매도 권유를 안 하고 조용히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 잘못이 적지는 않군요.

근데, 저도 억울합니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거였다면,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제가 인정하는 명작인
<취작>이나 <엑스트라바겐자>같은 걸 시키고 욕을 먹었어야 했는데
시즈쿠에는 그 정도의 애정은 없는데요.

아무튼, 시즈쿠라는 게임은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있고
멘탈이 약하신 분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할 수 있습니다.
미리 경고하고 리뷰합니다.


 

대략적인 공통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수업 도중,
갑자기 같은 반 여성인 카나코가 갑자기 일어나서 '섹X'라고 외칩니다.
처음에 다른 학생들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깔깔대며 웃었지만,
곧 카나코는 본인의 얼굴을 피가 날 정도로 할퀴며
퇴폐적인 단어를 반복해서 외치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며칠 후, 주인공은 학교 선생이기도 한 자신의 숙부에게 호출을 받습니다.
숙부는 카나코의 일기를 조사한 결과,
야심한 밤에 학교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카나코 이외에도 여러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선생이 움직이면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밤의 학교를 조사한다는 SF 사이코 호러물입니다.



비주얼 노벨로서의 특징적인 부분은 텍스트가 빽빽하게 화면을 덮는 방식입니다.
비에로게인 <제절초>나 <카마이타치의 밤>에서 사용된 방법을
에로게에 적용한 거죠.
단순히 스타일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당대 평균적인 에로게들에 비해 심도있고 강렬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주인공이 지닌 광기에 대한 묘사도 깊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은데,
이게 너무 근거 없이 과해서 중2병처럼 보여 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수업중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섹X'를 외치는 캐릭터나,
하늘에서 전파를 수신하는 중이라고 하는 캐릭터들도 있는데
기껏해야 노트에 끼적거리면서 혼자 망상하는 것밖에 없는 주인공이
'광기'가 어쩌구 하는 건 허세같이 느껴집니다.

만화나 소설에서 중2병이나 허세 스타일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점점 그 정도가 강해지다 보니 결국 선을 넘어 버렸고
이제 그런 요소의 대다수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플레이할 때는 시즈쿠의 이런 묘사에 대해 거부감이 별로 없었는데
오랜만에 플레이해 보니, 주인공의 중2병 망상이 플레이할 때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시즈쿠가 발매되던 시기에는 큰 문제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트렌드가 달라져 버린 거죠.



또 아쉬운 점은 스토리가 너무 짧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이 조사 의뢰를 받고, 그날 하루 밤만에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됩니다.
광기, 호러나 서스펜스 요소가 좀 더 고조되지 못하고
스토리가 끝나 버려요.

일단, 주인공 캐릭터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루리코 루트에서 주인공은 잡혀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모든 일에 도망치기만 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 장면 자체는 좋았지만 주인공이 진짜로 소극적이고 도망치기만 했는지 
공감이 잘 안 되었습니다.

숙부가 밤에 학교 좀 조사해 달라고 해도 그냥 수락할 뿐이었고,
다른 루트에서도 같이 조사하는 사오리나 미즈호를 열심히 구하려고만 했어요.
평범한 호구형 주인공으로 보였지
해야할 일에서 도망치는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토리가 길었다면 좀 더 주인공의 캐릭터 묘사를 충실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만악의 근원인 학생회장 타쿠야입니다.
독전파라는 초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MC물적으로 보면, '육체조작', '정신붕괴', '욕정강화' 등으로
비교적 초기 형태의 마인드 컨트롤 수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회장은 이 독전파를 사용하여,
카나코를 비롯한 학생회 여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 학생회장도 주인공 뺨치는 중2병입니다.
동어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광기를 어필하려고 하는데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플레이어한테 손발이 안 펴지는 독전파를 쓰는 것 같아요.



목격자 포지션의 배구부 소녀 사오리입니다.
음습한 게임 분위기를 일신해주는 밝고 
활달한 캐릭터로 많은 인기가 있으며 저 역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귀신 소문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주인공과 함께 조사하기로 합니다.
독전파에 조종당해 가위로 스스로를 찌르는 충격적인 엔딩도 존재합니다만
해피엔딩은 말씀드렸다시피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됩니다.
심한 일을 당하는 장면도 얼마 없고,
호러는 다소 약했다고 생각하지만 추격전은 나름 재밌었습니다.



스토리가 짧았던 점도 아쉬웠고,
뜬금없이 루리코의 등장으로 구출되는 것도 아쉬웠지만
멀티 엔딩 게임에서 보통 처음 보는 엔딩이라는 걸 감안하면 나쁘지는 않은 수준입니다.
사오리 루트에서 남은 건 사오리가 사랑스럽다는 사실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죠.



카나코의 절친한 친구인 미즈호입니다.
호러물에 빠질 수 없는 민폐 캐릭터입니다.

카나코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밤에 주인공과 같이 학교를 조사하기로 합니다.
함께 조사하는 걸 수락할 때만 해도 '폐는 안 끼치겠다'는 
전혀 믿지 못할 말을 합니다.

학생회장과 대면하고 나서,
'독전파 같은 게 있을 리 없어요.',
'그게 진실이라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라며
큰 소리를 뻥뻥칩니다.

회장이 전파를 쏘고 사태가 진짜로 위험해지자,
주인공이 도망치자고 하는데 미즈호는
'카나코를 두고 도망칠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둘 다 잡히죠.
잡혀서 심한 짓을 당하고 나서야 도와줘, 용서해줘같은 말을 하지만 
독전파에 잡혀서 꼼짝을 못하는데 어떻게 돕겠습니까?

그러던 중, 독전파의 힘이 약해진 빈틈을 타서 
주인공이 미즈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겨우 풀려난 미즈호는 다시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를 시전하는데
제발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습니다.



미즈호가 조금 답답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얼마 전까지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으로 조종당해서 
정신을 잃고 자신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믿기 쉬운 건 아니죠. 
그들의 사이가 어땠는지 정확히 모르는 플레이어가 공감하긴 힘들지만
미즈호의 태도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결국, 카나코가 약간이나마 제정신을 차려서 구해준다는 엔딩인데
나름 감동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리 자체는 사오리 루트보다 좋아요.



옥상에서 전파를 수신한다는 소녀 루리코입니다.
학생회장의 여동생이기도 하죠.
루리코 루트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루트이기도 합니다.

사오리, 미즈호와 함께 조사를 둘 다 거절한다면
루리코와 함께 다니게 됩니다.

주인공은 미즈호가 학생회장의 독전파에 붙잡혀 
심한 짓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정도는 미즈호 루트에서 겪었던 일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충격적인 장면은 사오리 루트에서 아무 일 없이 무사했던 
사오리가 붙잡혀 있던 상태라는 점이죠.

사오리 루트에서 사오리에게 애정을 준 사람일수록
이 예상치 못한 NTR씬은 충격적입니다.
오랜만에 플레이였지만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오리가 흐느끼며 애원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마음이 아프네요.
최근 명작 게임중에 전편의 주인공을 잔인하게 죽인 속편이 욕을 많이 먹던데
그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요.

어떤 루트에서는 특정 캐릭터에게 애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놓고,
다른 루트에서 그 캐릭터를 비참하게 ㄴㅇ한다는 건
지금 발매되는 게임에서는 맹비난이 두려워 감히 사용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멀티 엔딩 사용법으로 꽤 훌륭한 기교에요.

각 루트, 각 엔딩마다 예측할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기법인 거죠.
개인적으로 정석적으로 흘러가는 사오리나 미즈호 엔딩보다
전파가 폭주하는 토스터기 엔딩이나 
반전이 갑작스러웠던 카나코 번외 엔딩이 더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리뉴얼판입니다.
그래픽이 변경되었는데 원작의 느낌이 더 좋았다는 분이 많았습니다.
보이스가 추가된 건 좋았지만 
스토리는 큰 틀에서 변하지 않아 여전히 빈약했습니다.

2009년도에 <키즈아토> 리메이크에 동봉되어 판매되었을 때가 
이 게임이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때인데,
<키즈아토>를 기대하고 플레이했던 분들께는 
짧았던 스토리가 많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추천하지는 않는 게임입니다.
추천했다가 욕을 먹었던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 플레이해도 재미있을 정도의 스토리는 아닌 것 같아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짧은 스토리가 치명적입니다.
충격적인 광기를 다룬 작품은 이 이후에 많이 발매되기도 했구요. 

비주얼 노벨 초창기에,
선택지 게임과 멀티 엔딩 게임으로서 다양한 기교를 사용한 점은 훌륭합니다.
다만, 그런 요소들은 <키즈아토>에서 더 발전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시즈쿠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그 외, 리뷰에서 제대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BGM은 정말 좋았습니다.
원작과 리뉴얼판의 BGM 둘 다 마음에 듭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루리코의 해피, 트루엔딩은 일부러 리뷰에 적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진실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플레이하여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추천한 게 아니니, 제 욕은 하지 마시구요.

2020년 7월 12일 일요일

리뷰 : Filsnown -빛과 시간-(1995/8/3, Lea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Leaf사는 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은 많이 제작했고,
그로 인해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던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팬덤은 엄청나서
초심자가 '미연시 좀 추천해주세요.'라는 질문을 하면
'화이트 앨범은 해보셨나요?'라는 답변이 인삿말처럼 달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어 패치가 된 게임이 많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요.


PC-98시절의 Leaf사는 <시즈쿠>에
'리프 비주얼 노벨 시리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내 본 적은 없지만
현재는 에로게 거의 대부분이 비주얼 노벨의 형식으로 발매됩니다.

Leaf사가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 개척과 그 시스템 구축에
어느 정도 공헌했는가에 대해서 통일된 의견이 있는 건 아닙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시즈쿠> 이전에도
비슷한 요소를 먼저 도입했던 게임들은 많았다는 점입니다.
Leaf사 스스로도 시즈쿠를 제작할 때,
춘소프트의 <제절초>를 참고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극단적인 주장으로는 Leaf사가 한 일이라고는
'비주얼 노벨'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비주얼 노벨 용어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입니다.

에로게에서 '노벨'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한 사례로
칵테일소프트의 '에로틱BAKA노벨' 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어가 전연령판에는 쓰이기 힘든 단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어감 자체가 천지차이입니다.

대체 누가 '나 요즘 에로틱BAKA노벨 감상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겠습니까.
물론, '나 요즘 비주얼 노벨 감상하고 있어.'도 
어디가서 당당하게 말하기 힘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낫잖아요.
멋진 단어를 새로 만드는 건 쉬워 보이지만 충분히 인정해 줄 만한 업적입니다.

정리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Leaf사가 시작해서 대세가 된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는
시스템 자체의 참신함이나 혁신성으로 퍼지게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시즈쿠>, <키즈아토>, <ToHeart>라는
파급력 있는 작품들로 인해서 퍼지게 된 용어인 거죠.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일단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저는 최근 에로게의 거의 대부분이 비주얼 노벨로 만들어지는 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비주얼 노벨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는 게임들 중 상당수는 비주얼 노벨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에로게들이 시스템에 대한 고민없이
이전 작품들의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꼭 시뮬레이션 같은 장르가 아니라 
비주얼 노벨이라고 해도 충분히 선택지나 연출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 수가 있을 텐데,
많은 제작사들이 '비주얼 노벨이니까' 그런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색다른 시스템의 게임을 만들기도 힘들고, 
만들어 봐야 본전뽑기 힘들다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업계 전체가 그 방향으로 흐를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예전에 그렸던 에로게의 미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아서 너무 아쉽습니다.
시스템이 단순한만큼 스토리라도 좋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발매되는 에로게 중에서는 
논할 가치도 없는 스팀의 퍼즐 에로게같은 걸 제외하면,
동인게임에서나 새로운 도전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Leaf사는
오히려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회사 중의 하나입니다.
비주얼 노벨이 대세가 되었던 2000년도에 들어서도
<칭송받는 자>나 <티어즈 투 티아라>도 RPG류도 있었고,
뭔가 해보려다가 포기한 흔적이 보이는 <쿠사리>같은 게임도 있었죠.



Leaf사의 시작은 <DR2 나이트 작귀>라는 마작게임과
<Filsnown -빛과 시간->이라는 RPG였습니다.
두 작품은 Leaf사와 그 팬들에겐 흑역사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Filsnown은 필드 타입의 2D RPG입니다.
주인공은 여성으로 사고에 말려든 약혼자를 찾아 나서는데
약혼자는 안중에도 없고 H씬은 대부분 레즈비언 씬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게임은 밸런스만 좋다면 지금 플레이해도 무리가 없는데
이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좋게 말하면 무난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독창성이 없습니다.
발매연도를 보면 문제가 더 확연한데
94년도에 이미 좋은 에로RPG가 엄청 발매된 상황이었고,
오히려 이 게임은 그보다 별로입니다.



총평하자면, 제가 늘 할 말이 없어 리뷰를 스킵하는 평범한 에로게입니다.
데뷔작 <DR2 나이트 작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평이하고 그 이전에 발매된 게임들에 비해 강점이 없어요.
사실 저도 이 게임에는 별 관심없고
<시즈쿠> 리뷰 이전에 Leaf사와 비주얼 노벨에 대해서 글을 한 번 적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두 번 연속으로 물 먹은 Leaf사는
다른 회사와는 다른 걸 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비주얼 노벨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리뷰는 리프 비주얼 노벨 시리즈 1탄 <시즈쿠>입니다.

2020년 7월 5일 일요일

리뷰 : MISTY BLUE(1990/4/2, 에닉스)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80년대에 에로게를 가장 잘 만든 회사라면 역시 에닉스라고 생각합니다.
<드래곤퀘스트> 시리즈로 유명한 그 에닉스입니다.

저는 최근에 스퀘어에닉스에서 나온 <드래곤퀘스트 빌더즈2>를 재미있게 하기도 했고,
<드래곤퀘스트> 시리즈 덕분에 에닉스에 애착이 있는 사람으로서,
에닉스가 에로게 만들던 시절을 딱히 흑역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최강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에닉스로서는 그 칭호에 대해 억울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에닉스가 '모에'나 '에로'에 호소하는 '에로게'를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약간의 '성인 요소'가 가미된 '정통 어드벤처'를 만들려 했던 의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쿄 헌팅 스트리트>같은 진짜 흑역사를 제외하면
에닉스는 H씬이 없는 일반 어드벤처 게임이나
H씬이 있더라도 다양한 재미를 주려고 하는 어드벤처 게임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에로게와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에닉스를 최고로 치는 이유는 그냥 잘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면 에로를 넣지 말았어야죠.
딱히 어떤 게임을 저격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저는 잘 만든 작품이라고 해서 에로게가 아니라는 논리를 싫어하는 편입니다.



<MISTY BLUE>입니다.
사실상 에닉스 최후의 에로게이자 에닉스 어드벤처 게임의 종착역이라고 
불릴만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카즈야는 뮤지션 지망생으로서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마츠야마라는 고등학교 선배이자 프로듀서가 주인공과 같이 일해 보자고 권하여
주인공은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콘서트장에서 만난 주인공과 마츠야마는 의견 대립으로 말다툼을 하고 헤어집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주인공은 고교시절의 연인 마이코와 재회합니다.
주인공과 마이코는 고교시절 친구들을 불러 같이 술집에서 한 잔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자기 방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TV를 트는데
뉴스에서 말하길 고교선배 마츠야마가 살해당했고, 
직전에 말다툼을 한 자신이 유력한 용의자로 수배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경찰을 피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시대를 고려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연출과 사운드입니다.
오프닝과 스토리 군데군데에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장면이 눈에 띄고,
뮤지션을 지망하는 주인공의 스토리답게
신나는 사운드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는 
어드벤처 게임의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화 내용을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호감도를 옆에 있는 파란색 바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에 따라 대화 흐름이 변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인상적인 시스템이 많지만
가장 놀라웠던 시스템은 여러 사람과의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위의 CG는 주인공, 유타, 마이코, 에리의 네 캐릭터가 술집에 모여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파란색 테두리는 해당 캐릭터 선택 유무를 표시합니다.
마이코를 선택하면 마이코와 대화하고, 에리를 선택하면 에리와 대화하는 방식이죠.

재미있는 점은 중복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마이코-에리를 동시에 선택하면 주인공, 마이코, 에리 셋이서 대화하고,
마이코-유타를 동시에 선택하면 주인공, 마이코, 유타 셋이서 대화합니다.
넷 모두를 선택하면 넷이서 한꺼번에 대화합니다.
다양한 패턴으로 대화할 수 있는 거죠.


보통 이런 시스템은 별 내용도 없고 귀찮기만 하지만,
이 게임은 숫자패드의 1,7,9를 통해서 편리하게 선택/선택 해제를 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귀찮지 않고, 활용도도 훌륭합니다.
만일 주인공과 에리, 단 둘이서만 대화하고 있으면
에리를 몰래 좋아하는 유타가 질투하며 대화에 끼어드는 장면도 있습니다.



총평하자면, 에닉스가 꾸준히 어드벤처류를 만들지 않은 게 정말 아쉬울 정도로
동시기 게임들보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게임입니다.
다양한 시스템들을 사용했으면서도
독창성과 편의성,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스토리는 약간 아쉬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 게임들을 잘 아시는 분들에게는
분위기와 연출, 시스템만 감상해도 충분히 감동할만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