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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2일 일요일

리뷰 : Filsnown -빛과 시간-(1995/8/3, Lea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Leaf사는 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은 많이 제작했고,
그로 인해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던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팬덤은 엄청나서
초심자가 '미연시 좀 추천해주세요.'라는 질문을 하면
'화이트 앨범은 해보셨나요?'라는 답변이 인삿말처럼 달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어 패치가 된 게임이 많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요.


PC-98시절의 Leaf사는 <시즈쿠>에
'리프 비주얼 노벨 시리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내 본 적은 없지만
현재는 에로게 거의 대부분이 비주얼 노벨의 형식으로 발매됩니다.

Leaf사가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 개척과 그 시스템 구축에
어느 정도 공헌했는가에 대해서 통일된 의견이 있는 건 아닙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시즈쿠> 이전에도
비슷한 요소를 먼저 도입했던 게임들은 많았다는 점입니다.
Leaf사 스스로도 시즈쿠를 제작할 때,
춘소프트의 <제절초>를 참고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극단적인 주장으로는 Leaf사가 한 일이라고는
'비주얼 노벨'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비주얼 노벨 용어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입니다.

에로게에서 '노벨'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한 사례로
칵테일소프트의 '에로틱BAKA노벨' 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어가 전연령판에는 쓰이기 힘든 단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어감 자체가 천지차이입니다.

대체 누가 '나 요즘 에로틱BAKA노벨 감상하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겠습니까.
물론, '나 요즘 비주얼 노벨 감상하고 있어.'도 
어디가서 당당하게 말하기 힘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나마 낫잖아요.
멋진 단어를 새로 만드는 건 쉬워 보이지만 충분히 인정해 줄 만한 업적입니다.

정리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Leaf사가 시작해서 대세가 된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는
시스템 자체의 참신함이나 혁신성으로 퍼지게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시즈쿠>, <키즈아토>, <ToHeart>라는
파급력 있는 작품들로 인해서 퍼지게 된 용어인 거죠.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일단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저는 최근 에로게의 거의 대부분이 비주얼 노벨로 만들어지는 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비주얼 노벨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는 게임들 중 상당수는 비주얼 노벨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에로게들이 시스템에 대한 고민없이
이전 작품들의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꼭 시뮬레이션 같은 장르가 아니라 
비주얼 노벨이라고 해도 충분히 선택지나 연출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 수가 있을 텐데,
많은 제작사들이 '비주얼 노벨이니까' 그런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색다른 시스템의 게임을 만들기도 힘들고, 
만들어 봐야 본전뽑기 힘들다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업계 전체가 그 방향으로 흐를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예전에 그렸던 에로게의 미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아서 너무 아쉽습니다.
시스템이 단순한만큼 스토리라도 좋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발매되는 에로게 중에서는 
논할 가치도 없는 스팀의 퍼즐 에로게같은 걸 제외하면,
동인게임에서나 새로운 도전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비주얼 노벨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Leaf사는
오히려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회사 중의 하나입니다.
비주얼 노벨이 대세가 되었던 2000년도에 들어서도
<칭송받는 자>나 <티어즈 투 티아라>도 RPG류도 있었고,
뭔가 해보려다가 포기한 흔적이 보이는 <쿠사리>같은 게임도 있었죠.



Leaf사의 시작은 <DR2 나이트 작귀>라는 마작게임과
<Filsnown -빛과 시간->이라는 RPG였습니다.
두 작품은 Leaf사와 그 팬들에겐 흑역사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Filsnown은 필드 타입의 2D RPG입니다.
주인공은 여성으로 사고에 말려든 약혼자를 찾아 나서는데
약혼자는 안중에도 없고 H씬은 대부분 레즈비언 씬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게임은 밸런스만 좋다면 지금 플레이해도 무리가 없는데
이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좋게 말하면 무난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독창성이 없습니다.
발매연도를 보면 문제가 더 확연한데
94년도에 이미 좋은 에로RPG가 엄청 발매된 상황이었고,
오히려 이 게임은 그보다 별로입니다.



총평하자면, 제가 늘 할 말이 없어 리뷰를 스킵하는 평범한 에로게입니다.
데뷔작 <DR2 나이트 작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평이하고 그 이전에 발매된 게임들에 비해 강점이 없어요.
사실 저도 이 게임에는 별 관심없고
<시즈쿠> 리뷰 이전에 Leaf사와 비주얼 노벨에 대해서 글을 한 번 적고 싶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두 번 연속으로 물 먹은 Leaf사는
다른 회사와는 다른 걸 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비주얼 노벨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리뷰는 리프 비주얼 노벨 시리즈 1탄 <시즈쿠>입니다.

댓글 1개:

  1. np21//

    저도 화이트앨범을 옛날에 플레이했을 때는
    비슷한 이유로 기대에 비해 아쉬웠던 게임이었습니다.
    백색마약이라고 추천을 너무 많이 받아서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던 것 같네요.

    리메이크 나왔을 때 다시 플레이해봤는데 그때는 그럭저럭 재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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