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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8일 일요일

리뷰 : 동급생 리메이크(2021/2/26,FANZA GAMES)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2021년, 에로게의 레전드 중 하나인 <동급생>이 
FANZA GAMES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저는 동급생에 대해 
'천 년 후에 우리나라 미연시 역사책이 쓰여진다면 
그 첫 페이지에 적힐 작품'이라고 소개한 바 있고,
그에 걸맞게 이번 리메이크는 에로게로서는 이례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동급생 리메이크에 대해 살펴 보기 전에
먼저 동급생의 발매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예전에 적었던 리뷰에서 그나마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동급생은 PC-98기종으로 92년도에 처음 발매되었습니다.
당대 에로게 수준을 가뿐히 뛰어 넘은 동급생의 퀄리티는
엘프 사를 에로게 회사 중에서도 독보적인 톱까지 끌어올린 1등 공신이었습니다.
이 DOS 버전은 한국어판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되기도 했죠.

이후, PC엔진, 세가 새턴 등에 이식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99년도에 발매된 '동급생 WINDOWS판'입니다.



동급생 WINDOWS판은 DOS판과 캐릭터와 기본적인 흐름만이 같을 뿐
스크립트와 선택지 등이 상당히 달라졌고
엔딩은 전혀 다른 장면으로 변경된 게임입니다.
이런 변화때문에 원작 팬들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죠.
저는 나름 괜찮았다고 평가했었습니다.


2007년도에는 '동급생 오리지날'이 발매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92년도의 스크립트 + 99년도의 CG'를 합쳐 놓은 게임이었죠.
추가 요소도 딱히 없었고, 보이스마저 없었기 때문에
성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임입니다.

저는 '동급생 오리지날'의 발매를 
엘프 사에서 '동급생 WINDOWS판'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였습니다.
WINDOWS판이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면
오리지날이라는 이름으로 성의도 없는 게임이 발매되지는 않았겠죠.

그 후, 엘프 사는 망했고 엘프 사 게임의 판권들은
DMM GAMES(현 FANZA GAMES)로 이전되었습니다.
DMM은 엘프 사의 IP를 이용하여 다양한 웹게임을 발매했고,
그렇게 발매된 게임들은 퀄리티가 심히 좋지 않았습니다.
'드래곤나이트5 서비스 종료'때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죠.
DMM은 망해 버린 엘프 사를 능욕하고 있다고요.


동급생이 또다시 리메이크된다고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제 와서?'입니다.
92년판 기준으로 거의 30년이 다 되었으니까요.

제가 PC-98시절 게임들이 리메이크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과감한 변화입니다.
<ONLY YOU ~리쿨스~>, <진설 엽기의 함>, <진 유리색의 눈>같은 게임들은
캐릭터와 스토리의 큰 틀만 같은 뿐 어마어마한 변화를 주었죠.
저는 언제나 그런 게임들을 높이 평가했고요.

플로피 디스크 시절 게임은 어쩔 수 없이 볼륨 상의 한계가 있었고
내용이 어느 정도 축약될 수 밖에 없었죠.
그게 아니더라도 에로게의 초창기이자 격변기였던 90년대의 감성과 
에로게 패턴이 어느 정도 안정된 21세기의 감성은 많이 달랐습니다.
90년대의 게임이 21세기에 먹히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는 게
제 오랜 지론입니다.


하지만, 2021년도에 발매되는 동급생 리메이크에는
원작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동급생은 이미 99년도에 변화를 시도했다가 비난을 받은 전례가 있었고
둘째로, 저에게 FANZA란 망한 엘프 사 게임들을
이상한 방식으로 능욕하며 우려먹는 장사치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이번 리메이크는 92년도 동급생을 그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99년도 동급생 WINDOWS판을 그대로 사용했죠.
있는 그대로의 리메이크가 된 건 예상대로였습니다.

리메이크에서 거의 변화를 주지 않은 이유로
'시나리오를 변경하면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상충 될 수 있다.'
'추가 캐릭터나 추가 장면이 원작에서 괴리될 우려가 있다.'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변화가 없을 거라고 이미 한참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저로서는
이 얘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굉장히 불만스러웠습니다.

동급생이 아무리 과거의 명작이었다지만
볼륨으로보나, 시나리오의 흐름으로 보나
지금 통용될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아니나다를까 일본에서는 얕은 시나리오, 빈약한 H씬 등이 크게 비판 받았습니다.
과거의 원작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플레이어를 존중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가격에 아무런 시나리오 추가도 없는 리메이크는 너무한 것 같아요.



그래픽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인데,
그렇게까지 혹평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원작하고 달라진 점은 많지만 최근의 에로게들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인 미사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DOS판이 가장 괜찮았던 것 같지만
다른 캐릭터의 경우는 개별적으로 따져 봤을 때 
리메이크에서도 괜찮은 CG가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디자인이 가장 눈에 띄게 변한 캐릭터라면 역시 치하루입니다.
치하루의 스펙이라면 리메이크의 크기가 맞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제가 알던 치하루는 그걸 숨기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제가 이번 리메이크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시스템입니다.
원작의 시간 관리형, 장소 이동형 시뮬레이션은
요즘 게임 기준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시스템입니다만
동급생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대로의 시스템을 사용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걸 빼 버리거나, 난이도를 너무 쉽게 만든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거죠.

과연 리메이크는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플레이 첫 화면에서 UI를 살펴보면
큼직큼직한 버튼들이 눈에 띕니다.
태블릿이나 스마트폰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걸까요?



대화할 캐릭터가 앞에 있을 때, 
오른쪽 아래에 생기는 말풍선 버튼과 돋보기 버튼은 주목할만 합니다.

돋보기 버튼을 선택하면 원작처럼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마우스 커서가 바뀌는 포인트 클릭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죠.
말풍선 버튼을 클릭하면 굳이 포인트를 클릭할 필요없이
그냥 앞에 서 있는 캐릭터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근데 말풍선 버튼을 사용하는 게
과연 입을 클릭하는 것보다 편리한지 의문이 듭니다.
입을 찾아서 클릭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이것도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염두에 둔 걸지도 모르겠군요.

입이 아닌 다른 포인트를 클릭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동으로 다른 포인트가 선택되도록 변경되었다면 좋았겠죠.
그럼 포인트 클릭에 신경쓰지 않고 단일 버튼으로 플레이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정작 그런 상황에서 말풍선 버튼으로는 게임이 진행이 안 되고
돋보기 버튼을 눌러서 다른 포인트를 선택해 줘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말풍선 버튼의 역할은 오로지 입을 클릭하는 걸 대체해 주는 것 뿐인데
이게 뭐가 편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두 사람이 앞에 있는 경우는 오히려 더 불편하기도 합니다.
말풍선 버튼을 선택한 후, 누구랑 대화할지를 또 골라야 하죠.
기존 시스템이면 대화하고 싶은 캐릭터의 입을 그냥 클릭만 하면 되는데
한 번 클릭할 일을 두 번으로 늘려 놨어요.



리메이크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클래식 모드'와 '이지 모드' 두 모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게임 시스템에 대한 딜레마를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클래식 모드'는 원작의 시스템과 큰 차이가 없어
원작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이브/로드 방식은 차이가 있는데
99년판에서는 일기장을 이용하여 주인공 방에서 세이브를 할 수밖에 없었죠.
또한, 일기장을 모아서 세이브 슬롯을 늘려나가야 했습니다.

반면에, 리메이크의 경우는 언제든지 세이브할 수 있고,
세이브 슬롯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 변화만으로도 플레이는 전보다 훨씬 쉽고 쾌적해지죠.



'이지 모드'에서 추가된 힌트들을 살펴 봅시다.
우선 이동할 장소에서 만나게 될 캐릭터를 미리 알려줍니다.



전체맵을 보더라도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죠.
21세기 게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시스템이며,
리메이크에서 가장 호평할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아쉬운 점은 남성 캐릭터의 경우는 맵에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자하고는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남성 캐릭터하고의 만남도 스토리 진행에 중요한 경우가 있어요.

게다가, 특정 장소에 '남성-여성' 순서로 등장하는 경우에도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집 앞에서의 만남 이벤트가
남성 캐릭터인 마타로 -> 여성 캐릭터인 미사, 쿠루미 순서라면
집 앞에는 아무런 표시도 뜨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 표시가 없는 곳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방문하면서 확인해야 하죠.

그 외에도, 사토미의 경우는 카페 '안'에 있기 때문에 맵에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아코의 경우는 약국에 가면 약국 '안'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표시가 뜨지만
사토미의 경우는 찻집에 가면 찻집 '앞'에 먼저 간 후,
찻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표시가 안 뜨는 거죠.

딱히 찻집에서 사토미 이벤트가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에 다행이지만 
시스템적으로 뭔가 미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플래그 스케쥴을 미리 알려주는 시스템도 있습니다.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소와 시간대를 알려줄 뿐더러,
이벤트 등장 조건과 캐릭터의 현재 호감도까지 알려줍니다.
이것만 있으면 공략집을 따로 열어보지 않아도 플레이가 가능한 수준이에요.

게다가, 스케쥴표상에서 해당 이벤트를 클릭하면
아예 해당 이벤트의 시간과 장소로 점프가 가능합니다.
맵 이동따위 하나도 하지 않고
스케쥴표에서 간단하게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엔딩볼 수 있다는 거에요.



하지만, 이런 점핑 시스템을 사용하면
그 캐릭터의 엔딩에 반드시 필요한 주요 장면만을 보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냥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캐릭터와 잠깐잠깐씩 하는 잡담들은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특별한 CG도 없고, 큰 재미를 주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하고, 
당시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를 가볍게 묘사하기도 하는
소소한 재미정도는 얻을 수 있는 이벤트죠.

점핑 시스템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이런 이벤트들은 전부 뛰어 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면 리메이크는
'동급생 다이제스트'나 '동급생 하이라이트'가 되는 거죠.
동급생이 후속작으로 이어지는 내용도 없는데 다이제스트로 플레이할 필요는 없고,
안 그래도 요즘 관점에서 빈약한 스토리를 하이라이트로 플레이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점핑 기능은 최소한 줄이시는 걸 권장합니다.



또한, 이지 모드에서는 어떤 선택지를 고르면 호감도가 하락하고,
어떤 선택지를 고르면 호감도가 상승하는지도 표시해 줍니다.

원작 선택지도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편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이지 모드라지만 힌트를 너무 많이 주는 게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날지를 다 알려주는 셈입니다.

게임이 지나치게 쉽잖아요.
떠 먹여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뱃속에 부어 넣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로 많은 힌트를 원하시는 분도 있겠죠.
개개인의 취향을 맞춰주기 위해 
난이도 옵션을 좀 더 세분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맵에 만날 캐릭터가 표시되는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할 기능이었고,
점핑이나 선택지 보조는 게임을 지나치게 쉽게 해주는 기능이죠.
이 모든 힌트들이 패키지가 되어 
'힌트라곤 전혀 없는 클래식 모드'와 
'힌트에 깔려 죽어 보라는 식의 이지 모드'로 나뉘어져 있어요.
너무 극단적인 모드 선택입니다.

점핑 기능이야 그냥 안 쓰면 그만이지만
선택지 보조 정도는 별도로 ON/OFF를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일기장의 활용입니다.
99년판에서 일기장은 세이브 슬롯이었기 때문에 고생하며 모을 필요가 있었지만
리메이크에서는 세이브가 자유자재로 되기 때문에
일기장을 따로 모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일기장을 얻으면 축전 형식의 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급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KEY사의 히노우에 이타루나
엘프의 DOS 시절 스탭 아비루 토시히로, 타케이 마사키, 카도이 아야 등이 쓴
추억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꽤 괜찮았습니다.



저는 92년 동급생뿐만 아니라 99년 동급생도 많이 플레이했습니다.
게임이 발매되기 전에 제 기대가 적었던 이유도
동급생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추가 요소도 없는 리메이크가 
저에게 재미를 줄 수 있겠냐하는 점이었죠.

하지만, 플레이해보니 제게 있어 동급생은 역시 동급생이었습니다.
나름 재미있게 플레이했어요. 
특히 이타루의 일기장을 찾았을 때 큰 감정 변화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추억팔이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좋은 미연시를 찾는 분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90년대에 멈춰 있기 때문에
동급생에 대한 추억이 없는 분들께는 
그냥 빈약한 스토리의 미연시로 느껴질 수밖에 없겠죠.

미연시 역사에 남을 초기 작품인 옛날 게임 동급생을
보다 편리하게 플레이하고 싶은 분께는 추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들께는 '있는 그대로 리메이크'라는 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죠.

제가 추천하는 플레이 방식은 처음에는 '클래식 모드'를 하거나
혹은 '플래그 스케쥴'을 보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 위주로 플레이한 후,
남은 캐릭터들은 점핑 모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엔딩을 보는 방식입니다.
이게 리메이크를 가장 유용하게 플레이하는 법 같네요.

2021년 3월 21일 일요일

리뷰 : 이 세계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3)(1996/12/26,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이 세계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리뷰 3편입니다.
이전 리뷰에서 설명드렸다시피 
이 게임은 ADMS라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 ADMS의 맵이 얼마나 채워졌는지
그 진행도가 퍼센티지로 표시됩니다.

착실하게 여려 분기를 돌아다니며 맵을 채웠다면,
보옥을 전부 모은 시점에서는 진행도가 97~98%정도로 표시되며  
보통은 이쯤되면 이 게임을 전부 클리어했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아직도 게임은 한참 남았습니다.
97%정도의 진행도는 현세편의 진행도였을 뿐이며
아직 이세계편이 남아 있었던 거죠.

보옥을 전부 모은 후 삼각산의 비밀 동굴에서
주인공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전이하게 됩니다.
'데라 그란트'라는 이름의 세계죠.

초원, 밀림, 사막, 절벽 등의 대자연이 펼쳐져 있는 세상에서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은 세레스라는 이름으로
안타깝게도 말을 못합니다.
뜬금없이 이상한 세계로 전이한 주인공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온갖 수를 써 가며 열심히 의사소통을 해 보지만 
겨우 세레스라는 이름 석 자만 알아 냅니다.



다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아이리아입니다.
이쪽 세계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죠.
주인공이 있는 곳은 데라 그란트의 '보더(경계)'라는 곳이고
아이리아는 보더에서 괴물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안 그래도 병 때문에 오늘 내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세레스를 지키기 위해 괴물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얼마 안 가 죽게 됩니다.

어디를 돌아봐도 다른 사람은 없고,
주인공은 아이리아를 이어 보더의 파수꾼으로써
세레스와 단 둘이 살게 됩니다.



주인공과 세레스는 알콩달콩 살면서 딸까지 낳게 됩니다.
그 딸의 이름이 바로 '유노'입니다.

놀라운 반전이죠.
게임을 한참 플레이하여 플레이어가 게임 제목을 까먹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유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겁니다.



데라 그란트의 사람들은 빨리 성장하여 유년기가 굉장히 짧고
젊음은 오래도록 유지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합당한 이유가 밝혀지긴 하지만
에로게에서 참 편리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로게 캐릭터로서 적합한 연령대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아무튼 갓난아기이던 유노는 쑥쑥 큽니다.


그렇게 세 명이서 즐겁게 살아가던 어느 날,
제도에서 근위병이 쳐들어 와 세레스를 습격합니다.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세레스는 사망하게 되죠.



주인공은 기어이 따라가겠다는 유노와 함께
거대한 사막을 건너 제도로 향합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초, 치밀한 복선회수,
어마어마한 반전 등을 소개하자면 리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제 리뷰는 여기까집니다.

당대 에로게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장대한 규모의 
스토리가 펼쳐진다는 점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세계편을 끝낸 후에는 현세편에 아유미, 미오, 칸나의 진엔딩이 나타납니다.
엔딩 자체에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세계편을 클리어한 후, 2회차를 한다는 느낌으로 각 루트를 플레이하면
첫 회차에서는 미처 보지 못 했던 놀라운 반전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겠죠.
설명충처럼 반전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은근히 드러내는 고급스러운 방식입니다.



YU-NO의 서비스팩에는 대부분 대단한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지만
'소레유케! 세레스'라는 유치한 제목의 에피소드는 플레이할만 합니다.

이세계편은 당대 게임의 기술적인 한계로
칸노 히로유키가 하고 싶은 걸 다 하지 못했다는 게 보이는 편이기도 한데
특히, 세레스와의 스토리가 너무 부실했죠.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에피소드입니다.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 온 직후,
세레스와 어떻게 가까워지는가를 그려냈죠.
본편을 보강하는 내용이기 때문인지 
세가 새턴판과 리메이크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본편에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97년도에 발매된 세가 새턴판입니다.
뛰어난 이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도 했었죠.

CG는 가정용 게임기답게 좀 순화된 편입니다.
H씬은 아예 잘라냈지만 도저히 잘라 낼 수 없는 장면같은 경우는
아예 CG를 다시 그린 경우도 있습니다.

보옥도 여덟 개가 아닌 열 개로 늘렸습니다.
세이브 포인트를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거죠.

아쉬운 점은 게임 CD가 세 장이라는 점입니다.
음성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지만
그 때문에 ADMS를 사용하여 루트에서 루트로 이동할 때
CD를 갈아끼워 줘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죠.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 이외에는 이렇다 할 단점이 없는, 
원작에 충실한 리메이크입니다.
할 말이 많지는 않군요.



엘프는 DOS시절 최고의 에로게 회사였으며,
WINDOWS시절에는 DOS시절의 영광을 WINDOWS 버전로 리메이크하는 작업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였던 YU-NO만큼은
웬일인지 리메이크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000년도에 원작을 있는 그대로 이식만을 했을 뿐이었죠.

하락세에 있던 엘프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했지만
엘프는 어째서인지 리메이크를 하지 않았죠.
저는 당시에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엘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엘프가 2016년도에 망하고 불과 1년만에 리메이크가 만들어지죠.
걸림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엘프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듭니다.



2017년도에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4판입니다.
공개되자마자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디자인이 원작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있어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에로게를 리메이크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 나오는 반응이기도 하죠.

에로게 이외의 게임이나 애니에 대해서는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아는 에로게 계열 쪽에서만 말씀드리자면,
이쪽 계열에는 '리메이크의 그래픽 변화에서 오는 위화감을 무조건 거부하며
어떤 그래픽으로 변경되었든 일단 비판하고 보는 근본주의자'가 있고,
'원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라도 옛날 그래픽이 괜찮다고 하면 
안목이 더 높다고 쳐 주는 경향'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에로게 리메이크의 원화는 엄청 까입니다.
리메이크 작품 중 십중팔구는 비판받는 것 같아요.
심지어 원작이고 리메이크고 하나도 플레이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말이죠.

저는 이런 흐름에 있어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세월에 맞는 트렌드라는 것도 있고,
20년쯤 지나면 은퇴하거나 고인이 된 원화가도 많습니다.
원작의 그래픽만 고집하는 건 리메이크를 아예 하지 말자는 소리죠.

사람들이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옛날 원화가 더 좋았다고 하더라도 꼭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잖아요.
원화라는 게 취향이 갈리는 부분도 있고요.


YU-NO 리메이크 역시 전반적인 디자인에서 심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번만큼은 저도 비난의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네요.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대체 누굽니까? 이렇게 리메이크할 생각을 한 사람이.
원작의 육감적이던 느낌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에로게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래픽 지적을 거의 안 하는 사람입니다만
이번엔 좀 안타깝네요.

전반적으로는 세가 새턴판의 CG를 참고한 것 같고,
CG가 몇 개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게임 편의성 위해서 각 포인트마다 보조해주는 표시가 있는데
그게 비주얼적으로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표시가 포인트를 특정하기에도 편했고,
이미 선택한 포인트를 구분하기도 편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고 봅니다.
옵션으로 모드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겠지만
개발하는 일은 말만큼 쉽지는 않겠죠.


개인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4판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했던 건 ADMS의 조작법입니다.
보옥을 사용하는 것도 원작보다 힘들게 느껴지고,
세이브를 권장하는 분기에서 리플렉터가 반짝이면서
세이브 타이밍을 알려주는 기능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게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저말고는 아무도 이걸 문제삼지 않더라고요.
저 혼자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옵션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설정은 없었습니다.



ADMS의 맵을 더 화려하게 만든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특히 보옥으로 세이브하면 해당 장면의 CG와 간단한 설명도 볼 수 있는데
ADMS의 장점을 더 극대화시킨 시스템이죠.

빨강색이 미츠키루트, 보라색이 아유미루트, 주황색이 미오루트,
파란색이 칸나루트, 초록색이 카오리루트로 색으로 구분한 점도 훌륭합니다.



특히, 최종엔딩을 본 후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노란색이 마음에 듭니다.


그 외의 특이점으로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각 장면이 짧고, 개수도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장점은 아닙니다만
특이점이 있습니다.

라이브러리에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제가 특별히 세어 본 것도 아닌지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로 애니메이션 씬은 총 여섯 개가 있습니다. 

- 칸나와 욕실에서 대면 직전의 장면
- 아만다가 채찍으로 맞는 장면
- 주인공이 폐허가 된 채석장을 둘러보는 장면
- 아만다가 주인공에게 죽빵 맞는 장면
- 아만다가 주인공에게 죽빵 맞는 장면2
- 주인공과 유노가 키스하는 장면

아만다는 대체 뭘 밉보인 걸까요?
애초에 주인공과 유노가 키스하는 장면 이외에는 딱히 명장면도 아닙니다.
굳이 애니메이션을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네요.



한국어판 번역 퀄리티는 꽤 괜찮았습니다.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렇게 텍스트가 많은 게임에서 그거 몇 개 지적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 플레이하기에 쾌적했어요.

읽은 문장 스킵기능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초보자가 플레이하기 가장 괜찮은 게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로게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PC-98이지만요.



그 후, 플레이스테이션4 버전 리메이크는 
닌텐도 스위치와 스팀으로 이식됩니다.
스위치판과 스팀판은 플스4판에 비해 연출이 강화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본래 원작과 플스4판까지는
현세편만 포인트 클릭 방식을 사용하고
프롤로그, 이세계편에서는 명령 선택식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스위치판, 스팀판은 프롤로그, 이세계편조차도
포인트 클릭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옵션을 통해 '힌트를 본다'를 선택하면,
가야 할 장소와 사용할 아이템을 다 보여줍니다.
세이브할 상황 역시 힌트를 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어있죠.

보옥 세이브도 버튼 한 번의 조작으로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고
스팀판은 특히 마우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팀판도 추천드리고 싶지만 
한국어판이 안 나오는 이상 플스4판이 가장 추천하기 좋은 것 같네요.




총평하자면, 에로게를 넘어 어드벤처 게임으로서도
위대한 게임중 하나입니다.
스토리도 시스템도 극한으로 갈고 닦은
당대 최고들이 모여 만든 명불허전의 역작이죠.

아쉬운 점은 역시 리메이크가 너무 늦게 나왔다는 점입니다.
좀 더 화제가 될 수 있었던 시기를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엘프가 망하기 전이었더라면,
혹은 칸노 히로유키가 살아있을 때였다면 
어떤 게임이 나왔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보게 되네요.

2021년 3월 14일 일요일

리뷰 : 이 세계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2)(1996/12/26,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ADMS(Auto Diverge Mapping System).
오토 분기 매핑 시스템입니다.

YU-NO의 핵심적인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칸노 히로유키가 구상했으며 <XENON>에서 활용해 보려는 시도를 했었다는 설과
칸노 히로유키가 엘프에 왔을 때는 ADMS가 이미 있었고
칸노 히로유키는 그에 걸맞는 시나리오를 썼다는 설이 있습니다.
무슨 설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칸노 히로유키가 YU-NO에서 보여준 내용은
가히 천재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ADMS의 기본 시스템은 지금의 플로우 차트 시스템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선택지를 선택하며 게임을 진행하면
플레이어가 걸어 온 길을 선으로 그려 표현하는 방식이죠.
기본적으로는 플레이어가 선택한 길 외에는 아무 것도 표시되지 않지만
분기가 있는 부분에서는 짧게 끊겨 있는 선을 그어 놓음으로써
어느 부분에 분기가 존재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게임 도중에도 우측 하단에 있는 디바이스의 버튼이 반짝이면서
세이브할 타이밍을 정확히 알려줍니다.



우측 하단에 있는 리플렉터 디바이스는 
프롤로그에서 아버지가 보내준 소포에 들어있던 물건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병렬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 가장 빨리 와닿는 기능은 세이브죠.

지금의 퀵세이브 기능과는 약간 다르지만
당대에는 상당히 편리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정해진 타이밍에 우측 하단의 보옥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세이브가 가능하죠.

그 시절의 게임을 플레이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당시 게임들의 십중팔구는 세이브와 로드가 불편했습니다.
특정 지점에서만 세이브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시스템-세이브/로드-세이브할 슬롯을 지정'의
과정을 거쳐서 세이브를 해야했죠.
YU-NO는 그런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고 
버튼 클릭만으로 세이브되도록 단순화시켰습니다.



보옥으로 세이브를 하면 그 지점에 표시가 되고,
로드하는 방법은 맵을 열어 그 표시를 클릭하면 됩니다.

이런 세이브/로드 시스템에는 또 하나의 장점이 있는데
바로 세이브 상황을 가시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의 세이브/로드 화면은 스크린샷과 대사가 표시되어 
세이브할 때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고, 
세이브 슬롯에 가벼운 메모 정도를 적을 수 있는 기능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도스 시절에는 시스템적으로 
이 정도의 세이브/로드 화면을 만들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표준적인 세이브/로드 화면입니다.
세이브 할 때의 장소, 예를 들어 '지하실','복도' 정도의 텍스트를 표시하여
알려주는 기능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는 게임들도 많았죠.
게다가 세이브한 장소를 알려주는 기능은 무대가 넓은 RPG에서는 비교적 유용했지만
같은 장소의 이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 에로게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이브한 날짜와 시간으로 추측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다시 말해, 이 때 당시의 세이브는
게임 초반부의 세이브였는지, 후반부의 세이브였는지
A루트에서의 세이브였는지, B루트에서의 세이브였는지
선택지가 나온 중요한 상황의 세이브였는지
아니면 플레이하다 졸려서 자러 가기 전에 한 세이브였는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반면에 YU-NO의 시스템은 ADMS를 통해 세이브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시스템과 비교하면 아쉬운 점도 보이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훨씬 편리하면서도 더 우월한 
세이브/로드 시스템을 제공했던 거죠.


하지만, YU-NO가 사용한 ADMS 시스템의 핵심은 
단순히 세이브/로드가 편리했다가 아닙니다.
핵심은 병렬세계의 이동이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엘프 사의 포인트 클릭 시스템입니다.
<ELLE>, <동급생> 등에서 활용된 바 있는 시스템으로
YU-NO에서도 이 시스템이 사용되었죠.
이 시스템이 가장 훌륭하게 활용된 게임으로 YU-NO를 꼽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엘프식 포인트 클릭 시스템의 정점은
바로 YU-NO보다 1년 전에 발매된 <유작>입니다.



<유작>의 포인트 클릭 시스템은 YU-NO와 거의 다른 점이 없습니다.
제가 <유작>의 시스템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장르적 특성때문입니다. 
포인트 클릭 시스템은 방탈출 계열 게임인 <유작>에 더 어울린다는 거죠.

이전작들과 비교할 때, <유작>에서 새롭게 사용된 방법은 아이템의 사용입니다.
포인트를 클릭하여 '보다', '대화하다' 등의 간단한 행동을 하는 걸 넘어서
아이템을 선택한 후, 그 아이템을 적합한 포인트에 클릭하면
그 아이템이 사용되는 시스템이죠.

<유작>은 5층, 4층, 3층, 2층의 열쇠를 찾아 차례로 탈출하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해당층을 탈출할 힌트와 아이템은 그 층에만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4층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4층만 수색할 것이 아니라
이미 탈출한 5층도 적극적으로 탐색해서 아이템을 얻어야 하죠.
지나온 장소를 활용함으로써 게임의 무대를 더 넓힐 수 있었죠.

YU-NO의 시스템은 <유작>의 이러한 개념을
게임 내의 모든 시간과 병렬세계까지 확장시킨 겁니다.
게임 진행에 필요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는
현재 갈 수 있는 장소뿐만이 아니라
과거를 넘어 모든 병렬세계를 뒤져봐야 한다는 거죠.



이 할머니는 메인 악역인 류조지의 어머니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데 주인공에게 영문모를 소릴 하더니
갑자기 무슨 열쇠를 줍니다.
그 열쇠는 뒤에 있는 낡은 창고의 열쇠죠.



그 후 바로 류조지가 등장합니다.
류조지에게 열쇠를 돌려줄지 말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집주인이 뻔히 있는데 제가 열쇠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죠.
정직하게 돌려 줍니다.

그 후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친 후에
류조지의 저택에 다시 잡입을 하게 됩니다.
저택에 잠입한 후 어떤 짓을 해도 게임이 진도가 안 나갑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창고에 들어가야 하죠.
하지만, 창고 열쇠는 이미 돌려 줬습니다.
망한 겁니다. 열쇠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고,
열쇠는 주인공이 현재 갈 수 있는 그 어떤 장소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보자분들을 위해 약간의 플레이팁을 드리자면, 
처음 플레이할 때는 어떤 아이템도 사용하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고
최대한 아이템을 모으는 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류조지네 집 열쇠라고 류조지 주고,
아유미 회사 서류라고 아유미 주고 이러면 안 됩니다.
도저히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이템 사용은 일단 보류하고 들고 있는 편이 이득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막힌 상황에서 만일 보옥이 있다면 세이브/로드를 통해
막힌 상황에서 세이브를 하고 
다시 열쇠를 받은 후 돌려주지 않고,
로드를 통해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이런 방법은 다른 게임에 비해 편리하기는 하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죠.
보옥을 통한 세이브/로드 없이 그냥 다시 플레이하면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이 게임의 핵심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서재 문은 잠겨 있으며 게임 초반부에 들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장면도 있지만 
서재 열쇠는 집안 어느 곳을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어드벤처 게임에서 이런 장소는 최후반부에
수많은 스토리를 거친 후에야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죠.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자료도 없는 텅 빈 서재가 되었을 뿐이죠.
아버지의 공동 연구자인 류조지가 서재 내의 자료를 몽땅 가져갔습니다.

이 텅 빈 서재야말로 이 게임의 플레이 방법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서재로 들어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해진 시점에' 서재로 들어 가는 게 중요한 거죠.



서재의 열쇠는 칸나가 가지고 있습니다.
최후반부의 스토리인 칸나 엔딩을 보면 얻을 수 있죠.
칸나에게서 열쇠를 얻고 다시 병렬세계 이동을 통해
게임 초반부로 돌아와 그 열쇠를 사용하면 
드디어 자료가 있는 서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유미 루트에서는 아유미의 부하직원인 도요토미의 음모를 추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직접 눈으로 보고 모든 음모를 파악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증거가 없습니다.
보옥 세이브를 한 후 증거를 찾아서 다시 오는 방법밖에 없죠.

증거를 찾는 방법은 일단 증거 없이 도요토미를 추궁하는 겁니다.
주인공은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아유미에게 뺨까지 후려맞고
집에서 뛰쳐나가게 되죠.

가출한 이후에는 카오리를 만나게 됩니다.
카오리와의 H씬 이후에 카오리는 도요토미의 밀회사진을 주인공에게 줍니다.
늦었지만 이제서야 증거를 찾게 된 거죠.



증거 찾았다고 좋다고 집으로 달려가 보지만
도요토미는 이미 떠났고 아유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후입니다.
보옥 로드를 통해서 사태가 악화되기 전으로 돌아가
도요토미에게 증거를 제시하면 아유미 엔딩을 볼 수 있습니다.
텅 빈 서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의 밀회증거 역시 '사용해야 할 때'가 있었던 거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엔딩의 순서가 있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배드엔딩을 봐야 해피엔딩을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이 짜여져 있다는 점이죠.

최근의 게임에서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선택지를 아예 막아 놓거나
배드엔딩을 보고 다시 플레이를 해야 새로운 선택지가 뜨는 방식으로
엔딩의 순서를 정해 놓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해피엔딩을 먼저 보고 배드엔딩을 본다면
배드엔딩이 김이 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YU-NO가 발매될 당시에
엔딩의 순서를 시스템적으로 정해 놓는 것은 생소한 방법이었습니다.
자주 사용되었던 방법은 선택지를 많이 만들고 게임 난이도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해피엔딩을 못 보게 하는 방법이었죠.
그럼에도 운이 정말 좋다면 해피엔딩을 먼저 보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YU-NO는 ADMS와 아이템을 얻는 방식을 스마트하게 활용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아유미 엔딩 뿐만 아니라 여러 엔딩들이 실질적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죠.

진정한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야 합니다.
서재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칸나엔딩을 봐야하죠.
칸나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초념석이 필요한데
그것은 카오리 루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카오리 루트로 가기 위해서는 블루카드가 필요한데
그 블루카드는 아유미 엔딩에서 얻을 수 있죠.

병렬세계를 이용하여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어떤 스토리도 원하는 타이밍에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저한 계산을 통해 플레이어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순서를 모르고 다른 루트로 먼저 진입한다고 해도
보옥 세이브를 통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아요.



또한, 진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보옥 여덟 개를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옥들은 각 엔딩에 교묘하게 분포되어 숨겨져 있죠.
진엔딩을 모든 엔딩을 본 후에야 볼 수 있게 만든 방식 역시 영리했습니다.


보옥을 얻을 수 있는 힌트는 ADMS의 맵에 있습니다.
처음에 맵을 통해 보옥이 어디 위치쯤에 있는지 보여주지만
게임에 대해 파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다
맵이 제대로 그려지기도 전이기 때문에
보옥을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게다가,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보옥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병렬 세계에 대한 대략적인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아버지의 논문을
'안 읽어야' 책상 서랍 안쪽에 있는 보옥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게임 초반부에 미스터리가 즐비한 상황에서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는 논문을 누가 안 읽겠습니까?
누구라도 '읽는다'를 선택하겠죠.
치사하기 짝이 없는 방법입니다.

초보자분들께 또다른 팁을 드리자면,
보옥을 모으거나 엔딩을 보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분기를 경험하며 이 게임의 전반적인 틀을 확인하는 게
이 게임을 빨리 터득하는 방법입니다.
맵을 먼저 대충 그려 놓은 후에,
보옥 근처로 가서 이런 저런 시도를 해서 보옥을 모아야 하죠.


게임을 시작하면 보옥 두 개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보옥의 개수는 세이브할 수 있는 개수이기도 하죠.
<동급생2>의 일기장과 비슷하게 보옥을 모으면서 
세이브 슬롯을 늘려 나가는 겁니다.

주의하셔야 할 점은 보옥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세이브에 사용해 버리면
ADMS가 안 열려서 로드가 안 된다는 점입니다.
로드가 안 되면 세이브도 없이 플레이해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보옥 세이브 지점까지 찾아가서
보옥을 회수하는 수밖에 없어요.

초보자는 물론이고 숙련자라도
절대로 '자신은 이 게임을 잘 알고 보옥을 금방 얻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세이브 같은 거 없이 플레이해도 상관없어.'라는 마인드로
보옥을 다 써버리지 마세요.
이 리뷰는 그런 쓸데없는 자신감때문에 개고생한 멍청이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ADMS에 대한 설명입니다.
'병렬세계 이동을 통한 무대의 확장'같은 이 게임만의 독특한 시스템도
'게임이 진행될 수록 확장되는 세이브 슬롯'같은 당대 명작 게임에서 활용한 시스템도
'플로우 차트', '간편하고 알기 쉬운 세이브/로드 시스템', '엔딩의 순서'같은
후대에서나 개발되고 당시에는 생소한 시스템도
모두 ADMS 하나로 해결하려고 했던 거죠.

이 얼마나 욕심많은 짓입니까?
놀랍게도 YU-NO는 모든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습니다.
각각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시스템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멋진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시스템이며 시대를 앞선 시스템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습니다.

이런 YU-NO의 시스템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공략을 따로 보지 않아야 하지만,
공략없이는 난이도가 꽤 어려운 편입니다.
간편한 게임을 원하는 최근의 대세에는 맞지 않는 게임이죠. 
플레이하다 포기하고 결국 공략을 찾았다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가볍게 즐기고 싶다면 공략을 보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게임의 치밀한 시스템을 즐기고 싶다면
공략없이 플레이하는 2회차를 권유드리고 싶네요.
대략적인 틀을 다 알고 플레이해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입니다.



보옥 여덟 개를 모두 모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사실 '이세계편'은 그렇게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리뷰에 짧게 붙일 생각이었습니다만 
여기까지 쓰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드네요.

보옥을 다 모은 후의 이야기,
그리고 PC-98 이외의 YU-NO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