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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6일 일요일

리뷰 : 월희(1)(2000/12/29,TYPE-MOON)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2021년 8월 26일 <월희>의 리메이크작이 발매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사실은
리메이크가 살아 생전에 발매되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제 눈으로 못 볼 줄 알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 온 리메이크로
리메이크가 된다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이후에도 한참 기다렸어야 했던 게임입니다.
어떤 분은 리메이크 발매 소식을 듣고 '또 나와?'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옛날에 리메이크가 한 번 나왔던 걸로 알고 있었나 봅니다.

리메이크가 발매되면 리뷰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예상 못한 부분이 있어 리메이크에 관해 어느 정도 얘기할지는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리메이크에 대해 고민하는 중에 구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입문의 팬층은 엄청 두터우며, 
타입문의 세계관은 매우 심도 깊은 설정으로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월희>나 <Fate/stay night>를 좋아하지만
저는 그 정도까지 강력한 팬은 아니에요.

리뷰를 쓸 때 여러 설정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디까지나 에로게 및 비주얼 노벨 전반의 팬으로서
월희를 플레이하고 느낀 점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잘 아시는 분들이 보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0년도에 발매된 월희입니다.
본래 동인 게임이었고, 그만큼 미흡한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었습니다.

복잡한 세계관과 설정,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어우러진 게임으로
수많은 파생작들이 나오기도 했죠.
전설의 17분할이나 '크큭, 선이 보인다', '이것이 사물을 죽인다는 것이다',
'당신이 한국의 시키인 것입니까.'등의 드립도 이쪽 세계관 작품에서 나온 드립입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 게임입니다.
Leaf에서 에로게에 도입한 이후,
대다수의 에로게들이 비주얼 노벨 장르로 발매되었고
월희는 그 중에서도 Leaf의 스타일과 흡사하게 발매된 게임이었습니다.

특히, 스토리적으로 Leaf사의 <키즈아토>가 많이 연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월희가 발매되기 이전
<키즈아토>는 전기물 비주얼 노벨의 간판과도 같은 대표작이었는데
그런 작품과 흡사하다는 점은 이 게임의 평가를 깎아 먹는 요인이었죠.
지금은 월희에 비해 <키즈아토>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별 문제 없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초반 스토리부터 살펴 봅시다.
어릴 적 주인공인 토오노 시키는 사고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의식 불명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상한 선들이 보이게 됩니다.
'직사의 마안'이라는 능력으로 
과일칼로 선을 따라 살짝 긋기만 해도 침대가 동강이 나버리는
무시무시한 능력이죠.

다행히 입원 도중 뛰어난 마술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 마술사에게서 선이 보이지 않게 해 주는 안경을 받게 됩니다.
주인공은 건강의 문제 때문인지 가문에서 밀려나 다른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안경 덕분에 주인공은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설정이 참 매력적입니다.
당시에도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와도 어디에 꿀리지 않을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주인공은 자신을 쫓아낸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다시 토오노 가문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토오노 가문의 당주는 여동생인 아키하로
저택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쫓아 냈다고 합니다.
주인공과 아키하, 그리고 메이드 둘만 저택에 남게 되었습니다.

아키하는 히스이라는 무표정 메이드에게 주인공을 돌보라고 시킵니다.
어릴 때 플레이할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 둘의 첫인상이 무서웠죠.
히스이말고 코하쿠 좀 붙여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히스이의 쌍둥이 누나인 코하쿠입니다.
명랑한 메이드 스타일로 삭막한 저택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죠.
아무튼 이런 캐릭터들과 약간 기괴한 사건도 있긴 하지만
문제없이 대저택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주인공은 하교길에 금발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뭔가에 홀린 듯이 그대로 집까지 미행합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러 여인이 문을 연 틈으로 들어가
자신의 능력으로 여인을 열 일곱 토막을 내서 살해해 버리죠.

주인공은 시체 토막을 눈앞에 두고서야 '내가 왜 그랬지'하고 자책합니다만
알지도 못하는 여성을 한참 미행해서 토막까지 내버렸는데 
이걸 누가 우발적인 살인이나 충동적인 살인으로 보겠습니까?
이 정도면 비싼 변호사를 구할 게 아니라 
판사를 매수할 생각을 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주인공은 공원에서 자책하다 정신을 잃게 되는데
눈을 떠 보니 저택의 침대입니다.
코하쿠가 발견해서 데려왔다고 합니다.

주인공을 돌보던 히스이의 이야기로는 주인공 몸이 진흙투성이이기는 했지만
피는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공이 생각해 보니 모르는 여성을 갑자기 죽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래도, 토막 살인은 나쁜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주인공의 행복회로는 다음 날 등교길에서 바로 박살납니다.
살해당했던 여인이 등교길에서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주인공은 당황해서 도망가지만 그녀는 여유있게 주인공을 쫓아 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퀘이드로 정체는 흡혈귀였습니다.
그래서 열 일곱 토막이나 났음에도 사망하지 않았던 거죠.
이렇게 주인공은 최근 온 동네를 공포에 몰아 넣고 있는 문제인,
사람들이 피가 빨려 살해당한다는 연쇄 살인 사건과 
기이한 흡혈귀 소동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대략적으로 이 정도가 초반 도입부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이후로 캐릭터들이 숨만 쉬어도 재밌을 수밖에 없을 것같은 훌륭한 스타트입니다.



여러 장점이 많은 게임이지만 게이머들이 아쉬워했던 부분부터 살펴 보자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부족한 그래픽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시대보정+동인게임보정을 고려하면,
그렇게 혹평할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20년이나 그래픽을 일신한 리메이크가 나오지 않았던 게임이었고,
명성은 높은 게임이다 보니 
도전했던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느꼈던 요인이었습니다.

특히 H씬에서는 힘을 주려고 노력한 모습은 보이는데,
정작 그 H씬에 좋은 평가를 내린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안 되는 부분에 많은 CG를 할애하지 않고,
다른 부분 CG에 신경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보이스가 없는 것에 아쉬워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죠.
당시에는 상업게임에도 보이스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 동인게임에도 보이스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도 분량의 옛날 동인 게임에 보이스가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다만, 음악 파트도 취약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래픽, 사운드 면에서 불만족했던 의견이 많은 게임이었고
당대에도 도서로 나오면 모를까 PC게임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꽤 있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아 그걸 모두 속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죠.

사실 텍스트에 관해서도 비판이 없지는 않았는데
한국어 패치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느끼기 힘들 수 있으나
게임에 오타나 문장 구성 등이 많은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나리오 라이터인 나스 키노코의 문체 자체도 불호가 있는 편인데
월희는 초기 작품이다 보니 그런 점이 더더욱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다만, 가격은 상업 게임에 비해 많이 저렴했기 때문에
여러 부족한 부분에 대해 변명의 여지는 있습니다.
동인 게임이라고 무조건 온건하게 볼 필요는 없지만
가격이 싸면 그만큼 기대도 줄여야죠.



<키즈아토> 리뷰에서도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만의 특성을 잘 이용한 점은
게임으로서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은 다른 매체와 달리
얼마든지 배드 엔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높은 긴장감을 줄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작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아무리 죽을 위기에 빠졌다고 해도 주인공이나 인기 캐릭터는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 남을 거라고 예측하기가 보다 쉽죠.

반면에 비주얼 노벨은 위기에 빠지면 그냥 죽여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사망은 배드 엔딩 중 하나일 뿐이고 스토리는 다른 루트에서 그대로 진행하면 되니까요.
그만큼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반전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거죠.

이 게임에서도 '이건 완전히 죽었다' 싶었을 때,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꽤 있었습니다.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살아나는 장면이 있어서 아쉬웠지만요.



그 외에도 눈여겨 볼 부분은 게이머를 방심시킨 후에 배드엔딩을 보여 주는 수법입니다.
어떤 파트에서는 잘못된 선택지를 고른 후에도 당장 큰 사건은 터지지 않고
한참동안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게이머가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던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평온을 주면서 방심시키는 거죠.

그 후, 주인공이 갑작스러운 빈혈로 정신을 잃게 되고 밤 늦게 하교를 하게 됩니다.
다행히 이 게임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 코하쿠가 데리러 왔습니다.

하교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코하쿠가 이상한 방향으로 주인공을 데려 갑니다.
집으로 가야하는데 학교 계단을 올라가고 있어요.
코하쿠한테 물어 보려고 하는데 코하쿠는 어느새 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앞에 흡혈귀가 나타나 주인공을 죽여 버려 배드엔딩으로 직행하게 되죠.

선택지를 잘못 골랐다고 바로 배드엔딩을 주는 게 아니라
평온을 줘서 선택지를 골랐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 후, 
그 평온을 하나하나 사라지게 하면서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호러와 미스테리 요소 또한 훌륭했습니다.
<키즈아토>와 비슷한 전개로 흘러간 부분은 아쉬웠지만
여러 사건들을 활용해서 주인공이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과정은 
<키즈아토>보다 더 발전시켜서 풀어냈죠.

다만, 기본적인 루트가 다섯 개나 되는데
몇몇 루트에서는 트릭이 사실상 중복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누구 루트에서 주인공이 범인이 아니라는 점이 이미 밝혀졌는데
다른 루트에서는 또 다시 주인공이 다시 범인인 척 트릭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묘사를 색다르게 해봤자 벌써 김 다 새버린 거죠.



사실 그런 아쉬운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루트별로 뛰어난 반전이 많은 게임입니다.
다섯 캐릭터 중에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듯이
캐릭터별 스토리 중에도 버릴 부분이 없어요.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개별 스토리에 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2021년 9월 19일 일요일

리뷰 : 마사루 내일의 유키노죠2(2002/9/27,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유키노죠>의 속편으로 발매된 <마사루 내일의 유키노죠2>입니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은 전원 교체되었지만
전작의 캐릭터들도 비중있게 등장하는,
일상물 에로게 속편으로서는 보기 드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게임이죠.

대체로 보컬 곡에 약한 모습을 보였던 엘프 사 게임 중에서
가장 신나는 오프닝 곡을 사용한 게임입니다.
오프닝 영상 싸비 부분에서 30초동안 미소녀 캐릭터는 안 보여주고 
남자 둘이 복싱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점도 특이한 점이죠.



주인공은 전작에서 불의의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였던 쿠보 마사루입니다.
혼수상태에서는 천만다행으로 깨어 났으나
당연히 다시는 복싱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죠.
학년도 유급을 하게 되어 한 살 어린 친구들과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과묵하고 어두운 캐릭터였던 전작의 주인공과 비교해서
이번 주인공은 활기차고 밝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에로게 주인공으로서는 확실히 이쪽이 더 재미있습니다.



상황은 전작의 세리나 진엔딩에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유키노죠는 세리나와 사귀는 채로 그 동네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고,
쇼코는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죠.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고,
잠깐 얼굴만 비치는 경우도 있지만
쇼코는 전작 캐릭터 중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유키노죠를 완전히 다 잊지는 못한 것 같지만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착한 여동생 캐릭터입니다.
전작에서 어설펐던 복수심을 갖고 있는 캐릭터보다 훨씬 어울려요.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쇼코 너무 귀엽습니다.



그 외에도 아예 전작의 주인공인 유키노죠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도
스토리 도중에 끼어 있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1편 메인 히로인인 세리나가 극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합니다.
'핑크색 머리카락은 메인 히로인의 상징!'이라든가
'다음 출연은 마작일 줄 알았는데'같은 메타발언도 여전하죠.

세리나와 2편 주인공 마사루와의 궁합도 의외로 괜찮아서,
재미있는 개그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일부 스토리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활약하기도 하죠.



그 외의 전작 캐릭터들의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캐릭터들은 전작의 비호감 이미지에서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유키하고 사나에같은 경우는 개인 엔딩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안 그래도 전작 엔딩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하네요.



사나에의 스토리는 별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유키 스토리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1편에서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스토리였죠.



전작과의 연결점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기로 하고 2편만의 이야기를 해 보면,
2편의 메인 히로인은 미즈시마 아키라입니다.
느긋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는 캐릭터로
전작의 에너지 넘치는 세리나와는 많이 다른 캐릭터죠.
주인공의 반찬을 뺏어 먹거나 밥을 사달라고 하는 등
주인공을 자주 뜯어 먹으려고 하는 특성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과 늘상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엔딩의 개수는 26개로 전작에 비해 조금 줄어 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편입니다.
다만, 전작에 비해서는 확실히 애매하고 별 필요없는 엔딩이 줄어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는 애매한 엔딩이 아닌
망할 때는 확실히 망하는 배드 엔딩입니다.
아키라같은 경우는 아예 형무소에 들어가는 엔딩이죠.
그 외에도 여성 캐릭터가 멀리 떠나든가, 완전하게 이별하든가 등
어떻게든 결말이 나는 엔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판점을 굳이 찾자면 몇몇 결말이 복선도 없이 너무 급하게 전개되어
끝맺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죠.



치하루의 경우를 봅시다.
치하루는 복싱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 복싱부의 매니저를 하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의외로 복싱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는데
복싱을 가르쳐 준 치하루의 아버지가 일본 챔피언까지 올랐던 복싱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치하루의 아버지는 은퇴한 이후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며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직장에서 잘려 버리고, 살던 집은 화재 사건으로 홀랑 타 버리기까지 하죠.

주인공이 불난 집에 뛰어 들어가 아버지의 벨트를 꺼내 오기도 하고, 
주인공의 호의로 치하루는 주인공 가족이 사는 집에 얹혀 살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치하루 아버지 일자리까지 알선해 줍니다.
이 정도면 뭐, 주인공이 치하루 일가의 어마어마한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치하루와 맺어지는 게 치하루 엔딩이죠.
주인공이 알선해 준 아버지의 일자리가 먼 곳에 있어 치하루도 떠나게 되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이어진다는 엔딩입니다.



배드엔딩에서는 치하루의 아버지가 
복싱부 주장 아키오네 집안이 경영하는 체육관에 취직하게 됩니다.
중간 과정 다 잘라 먹고 세월이 흐르니
아키오는 챔피언이 되고 치하루는 아키오의 약혼녀가 되었다는 엔딩이죠.



복싱부 주장 아키오입니다.
전작부터 등장했던 캐릭터인데 저는 언젠가 이 캐릭터가 뒤통수칠 거라고 진작에 예상했죠.

문제는 저 엔딩을 제외하면 게임 스토리에서
아키오와 치하루가 이어질 복선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둘의 관계를 묻기까지 하는데
아키오는 '자신은 쇼코 일편단심!'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남녀 관계라는 게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지만,
창작물의 엔딩으로서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습니다.
엔딩에서 명확한 결말을 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엔딩의 개연성은 부족한 면모를 보여준 게 흠이었죠.



마키의 경우도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보였습니다.

마키는 주인공보다 두 살 연상의 대학생으로 재벌집의 아가씨입니다.
게다가 마키가 3학년, 주인공이 1학년이었던 시절에
둘은 서로 연인이었던 관계죠.

마키의 졸업식날, 뜬금없이 마키가 '이제 대학생활을 즐기겠다'하면서 주인공을 차 버립니다.
주인공은 별 이유도 없는 실연에 큰 충격을 받았고
마키와의 관계를 흑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마키와 길가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마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에게 쇼핑 좀 도와달라고 하는 뻔뻔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이없이 차인 충격이 아직 남아 있는 주인공은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같이 다니게 되고,
그 이후로 마키가 계속 주인공을 찾아 오죠.

주인공이 실연의 충격을 마키에게 이야기하며
'지금까지 일은 이제 다 잊어 줄 테니까, 이제 그만 나를 내버려 둬.'라고 말하지만
마키는 '지금까지 일은 다 잊겠다.'라는 말만 쏙 빼듣고 여전히 주인공과 어울리려고 하는
방약무인한 아가씨입니다.



어쨌든 어찌어찌하여 둘은 연인이 되고, 반 년이 흐르게 됩니다.
쇼코는 주인공과 대화 중 '주인공은 마키에게 반 년간 단 한 번도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재벌집 딸인 마키니까 필요한 게 없을 거다.'라는 게 그 이유였죠.

착하고 귀여운 여동생 쇼코는 주인공에게
'속는 셈치고 뭐든지 선물하면, 마키씨가 기뻐할 거야'라는 조언을 해 줍니다.
주인공은 납득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여동생의 이야기를 따르기로 하죠.
마키에게 갖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기도 하고,
혼자 나름대로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해피엔딩이고 배드엔딩이고 
주인공이 마키에게 뭔가 선물하는 장면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분기가 많은 게임이다 보니,
제가 어디서 못 보고 지나쳤는 줄 알았어요.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작은 이벤트가 될 수도 있는 장면이고
클라이막스의 피날레를 장식할 중요한 장면이 될 수도 있는 장면인데
이 장면을 빼 먹으면 어떡합니까?
물론, 전개가 예상되는 뻔한 장면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빌드업했으면 선물주는 장면이 당연히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이 정도면 엔딩을 많이 만들다 보니 작가가 
만들던 스토리를 까먹은 거 아닙니까?



이런 국지적인 비판을 제외하면 스토리는 나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편입니다.
각 캐릭터의 고민과 심리 묘사도 깊게 들어가는 편이고,
전작에 비해 패턴이 다양해진 점이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과 맺어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우리의 여동생 쇼코가
유키노죠와의 과거를 극복해나가는 스토리를 따로 만든 점도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엔딩도 존재합니다.
복싱을 그만둔 이후 목표도 없이 살던 2편의 주인공과,
복싱을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자신을 속이던 1편의 주인공이 대결하는 장면이죠.

2편뿐만 아니라 뭔가 엉성했던 1편까지
제대로 완결시킨 멋진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총평하자면, 1편을 재밌게 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고,
1편에 실망한 사람이라면 그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게임입니다.
에로게로서 H씬은 전작에 비해 약하지만
나머지 모든 부분이 전작을 능가하죠.

전작의 캐릭터를 대거 투입했지만
전작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상술이 아니고,
오히려 전작의 가치를 높여 주는 점이 특이합니다.

1편과 2편이 동시에 발매되었다면 1편의 평가도 더 올라갔으리라는 의견은
정말 예리한 분석이라고 생각됩니다.
내일의 유키노죠 시리즈를 플레이한다면
텀을 두지 않고 한꺼번에 플레이하기를 권장합니다.

2021년 9월 12일 일요일

리뷰 : 마법소녀 아이3(2008/12/19,colors)

<내일의 유키노죠2> 리뷰가 생각보다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번외 편으로 다른 리뷰를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로게 역사상 최악의 게임은 대체 무엇일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취향은 제각기 다릅니다.
저도 정말 싫어하는 게임들은 따로 있죠.

하지만, 사상 최악의 에로게를 뽑으라면 역시 이 게임이 뽑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마법소녀 아이3>입니다.

오늘 리뷰는 예전에 적은 글을 짜집기해 올리는 것으로서
평소보다 루머가 더 많이 섞여 있으며 팩트 체크는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 정도로 봐 주시길 바랍니다.



사상 최악의 에로게를 꼽으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유력 후보인
전설의 에로게 <마법소녀 아이3>입니다.

당시 돌았던 소문으로는
'올클리어한 게임을 소비자 센터에 문의해서 환불을 받았다.'
'에로게 가게 점주들이 모여서 이 게임을 계속 팔아도 될지 회의를 했다.'
'제작사는 정신적 피해를 이유로 집단 소송을 당했다.' 등이 있습니다.
적어도 소비자 센터에 문의해서 환불받았다는 얘기는 확인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 게임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3편 발매 이전, <마법소녀 아이>시리즈는 
마법소녀 에로게의 시조로 꼽히던 게임이었으며
<마계천사 지브릴>시리즈와 함께 장르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고정팬층이 어느 정도 있는 작품이었으나
2002년도에 <마법소녀 아이2>가 발매된 이후 6년이나 속편 발매가 되지 않고 있었죠.

그 와중에 제작사인 colors는 망해 버렸고,
colors는 야쿠자 영화를 만들던 회사에 인수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colors는 자사 최고의 시리즈인
마법소녀 아이의 속편을 만들기로 합니다.
그게 마법소녀 아이3인 거죠.



마법소녀 아이3가 어떤 게임인지는
발매되기 전부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공식사이트에 게재된 샘플 CG는 모두 1편과 2편의 CG였죠.
새로운 CG따위는 단 한 장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 라이터도 변경되고, 주인공인 아이의 성우도 변경되는 등
얼마 없는 정보만으로도 비판받을 부분이 보이는 게임이었습니다.
물론, 발매되고 나서는 고작 저 정도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리고 발매 2일전이 되면서,
인터넷에는 믿지 못할 폭로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클리어 후에도 CG 및 이벤트 감상 모드가 없다.'
'H씬에 돌입해도 CG가 없고 화면이 새까매진다.'
'DVD를 사용하는데 게임 용량이 고작 500MB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로 패키지 뒤에 쓰여져 있는 권장사양에는
HDD 1.5GB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게임 발매 후에는 더더욱 이 게임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데이터를 뜯어 본 결과, 이 게임의 CG는 총 14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중복되는 CG가 5장, 이전작의 CG가 2장으로
실질적으로 신규 CG는 7장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다.
게임 패키지에는 전작의 CG를 덕지덕지 붙여서 CG가 충분한 게임으로 속였던 거죠.

심지어 그 중 H씬 CG는 전혀 없었습니다.
에로 없는 에로게였어요.



총 플레이 타임은 30분밖에 안 된다는 얘기도 돌던데 
그렇게까지 짧은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봤자 두 시간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게임이었지만
전부 스킵을 하지 않는 이상 30분만에 클리어할 정도는 아니었죠.

문제는 미완성 게임은 아니라는 제작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게임 데이터를 뜯어 본 결과 '시나리오 전(前)편'이라는 스크립트 파일명이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全편이 아니라 전편, 후편할 때 그 전편이요.
원래 계획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미완성 게임이었던 거죠.


이렇듯 시나리오, CG할 것 없이 엉망진창이었던
이 게임의 가격은 무려 당시 풀프라이스인 9120엔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에로게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믿지 못할 가격이었죠.

구매자들의 분노는 엄청 났으며
colors는 며칠 후 신규 요소를 추가한 패치를 무료 배포하겠다는 글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그마저도 불과 30분만에 삭제했습니다.



다행히 다음 해 2월에 추가 요소가 들어간 게임이 나왔습니다.
그래봤자 CG는 32장밖에 없는 게임이었지만,
어쨌든 H씬 CG는 들어 있는 에로게였죠.
시나리오도 꽤 늘어났습니다.

새로운 게임의 가격은 무려 10000엔이 넘어갔습니다.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하는 가격이긴 한데
제 기억과 달리 초기작을 구매한 사람을 위한 무료 패치도 배포하긴 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어마어마한 악명에 힘입어 이 게임은
KOTYe라는 그 해 최악의 에로게를 뽑는 제전에서
당당하게 초대 수상작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단순히 초대 수상작이 아니에요.
원래 KOTY는 쓰레기 게임을 선정할 뿐 에로게를 따로 뽑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에로게 부문이 만들어졌어요.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던 상을
오로지 '마법소녀 아이3'를 선정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겁니다.

매년 니코동에 올라오는 KOTYe 후보작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
초기 영상의 도입부에는 꼭
'자, 올해는 마법소녀 아이3를 넘는 쿠소게가 나왔을까요?'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죠.
사람들의 반응은 '무리www'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전설적인 쓰레기 게임 마법소녀 아이3에 대해 제가 기억하는 부분입니다.
제 플레이 감상을 짧게 덧붙이자면
의외로 스토리 초반부는 상당히 몰입감이 있습니다.
저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시 저와 비슷한 평가를 했던 사람을 두 사람정도 봤어요.

저는 이 게임의 명성을 알고 나서 플레이한 사람입니다.
초반부의 시나리오가 꽤 괜찮았기 때문에
'그래, 얘네들이라고 처음부터 쓰레기 게임을 만드려고 한 건 아닐거야.'하는
동정심이 들었었죠.
그 동정심이 사라지기도 전에 게임이 너무 짧아서 끝나 버리더라고요. 
생각보다 더 내용이 없어서 숨겨진 루트가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대부분 쓰레기 게임으로 회자되는 게임은
고통스러운 내용이 안 끝나고 길게 이어지는 게임입니다.
이 정도 수준의 짧은 게임은 꽤 있어요.

이 게임의 문제점은 CG가 적고, H씬은 아예 없다는 사실 이상으로
전작에 있던 요소들을 이용한 홍보로 사기를 쳤으며,
저가형 게임으로 나와도 부실한 게임을 비싼 가격으로 팔아 먹었다는 점이겠죠.
누가 봐도 사기칠 생각으로 가득한 게임이었습니다.



총평하자면, 기대치를 지옥의 가장 끝 바닥까지 낮춘다면
생각보다는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처음 나왔을 때 시리즈의 팬에게는 큰 충격이었겠지만
전혀 관련없는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사기칠 생각없이 제대로 완성된 게임을 만들려 했다면
마법소녀 아이 시리즈는 계속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잠깐은 사기쳐서 돈을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른 셈이 됐다고 할 수 있겠네요.

2021년 9월 5일 일요일

리뷰 : 내일의 유키노죠(2001/8/31,el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유키노죠> 시리즈는 그 시절 엘프 사에서 발매한 에로게 중에서
가장 트렌드에 가까웠던 게임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선택지형 비주얼 노벨 게임이죠.

이 게임만의 독특한 부분도 있지만 일단은 1편의 스토리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프롤로그는 게임의 메인 히로인 카스가 세리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보충수업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하교하던 세리나는
학교 앞에 엄청난 꽃미남이 서 있는 걸 발견합니다.

이 정도 꽃미남이 학교에 소문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에
이 남성은 이 학교 학생이 아닌 외부인이 틀림없죠.
세리나가 말을 걸어 보지만 남성은 무뚝뚝하게 대답도 안 하고 사라집니다.



남성의 무시에 열받은 세리나는 소꿉친구가 같이 놀자고 하여 오락실에 갑니다.
근데, 소꿉친구는 온데간데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혼자 게임 도중에 양아치들과 얽히게 되었죠.



세리나의 태도에 화가 난 양아치들은
으슥한 골목에서 세리나를 습격합니다.
세 남성의 힘에 손도 못 쓰고 당할 위기에 놓인 세리나였으나
학교 앞에서 봤던 꽃미남이 갑자기 나타나 '폭력, 멈춰'를 외칩니다.
양아치 세 사람은 꽃미남과 3대1로 싸우게 되며
세리나 시점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본편에서 주인공은 새로 전학을 오게 된 학생으로서
바로 세리나와 마주쳤던 꽃미남 유키무라 유키노죠입니다.
세 양아치에게 반격 한 번 못 해보고 두드려 맞았기 때문에
잘 생긴 얼굴은 붕대에 가려져 있는 상태죠.
붕대는 며칠 후에 풀게 되는데 학교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미소년입니다.

유키노죠는 쿨하고 과묵한 스타일입니다.
작중 세리나의 표현으로 '이대로 가면 엘프 사상 가장 음침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메타 발언도 나옵니다.
그만큼 깊은 사연을 품고 있는 주인공이기도 하죠.



주인공의 옆자리는 어제 도움을 받았던 세리나입니다.
주인공이 백마 탄 왕자님처럼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으로 맞기만 해서 적잖이 당황을 했지만
어쨌든 감사의 마음은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리나와 주인공을 도와 준 건 세리나의 소꿉친구들인
텟페이와 타츠야입니다.
둘 다, 대놓고 세리나를 좋아하고 있는데
세리나는 둘의 마음을 영 몰라 줍니다.

사실 타츠야는 억울할 만도 한데 부자집 도련님에,
유키노죠 이전 학교 최고의 꽃미남 자리도 차지하고 있던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그렇게 나쁜 캐릭터가 아니지만 
세리나와 가까워지는 주인공을 계속 견제하고 
루트에 따라 좀 심하게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통 큰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는 텟페이와 비교되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세리나는 발랄하고 감정 표현에 솔직한 오지랖형 캐릭터입니다.
'이 이야기의 히로인은 나야'같은 메타 발언도 가끔 하며,
게임의 재밌는 상황은 대부분 이 캐릭터에서 나옵니다.

뭐든지 소극적으로 회피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과도 잘 어울리는 조합이죠.
주인공에게 은혜도 느끼고 있고, 첫 만남에서 반하기도 했기 때문에
자꾸 주인공과 같이 뭘 하려고 합니다.
이 게임의 전개에 필수적인 윤활유 같은 캐릭터죠.



그렇게 새로운 학교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점 마음을 열어 가는 주인공 앞에
주인공의 옛 소꿉친구인 쇼코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을 따라 전학을 온 쇼코는
주인공에게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남깁니다.

쿠보 마사루, 쿠보 쇼코, 그리고 주인공인 유키무라 유키노죠
세 사람은 소꿉친구였습니다.
쇼코는 마사루의 여동생이기도 하죠.

마사루와 주인공 두 사람은 복싱 특기생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잡지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복싱 선수로
'내일의 유키노죠'라는 제목부터 전설적인 복싱 만화 <내일의 죠>의 패러디죠.

그러던 중 불행한 사고가 겹쳐 마사루는 유키노죠와 시합 도중
의식 불명의 중태에 빠지게 됩니다.
주인공은 죄책감에 빠져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듯이 전학을 왔던 겁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을 때릴 수도 없게 되었죠.

쇼코의 등장과 함께 주인공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지게 되고
여러 캐릭터들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는 게
이 게임의 기본적인 스토리입니다.



캐릭터를 살펴 보면, 세리나와 쇼코 이외의 캐릭터는
다소 애매하다고 느껴집니다.
애초에 엘프 사가 캐릭터에게 과도한 개성을 부여하는 회사가 아니기도 하지만
스토리가 큰 틀에서 다들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개성이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캐릭터는 타에코입니다.
주인공의 외모에 반해서 팬클럽을 만들기도 하는 적극적인 후배로
무려 15자매의 막내라고 합니다.

눈치가 없어서 말을 필터 없이 할 뿐더러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울어 버려서 주인공을 곤란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민폐 캐릭터죠. 나쁜 쪽으로 튀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이 곤란해 하는 것과 세리나가 열 받는 것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이 하는 일이 주인공을 위한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해도 여전히 별로였네요.

이런 캐릭터는 대부분 공략 불가 조연 캐릭터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 팬보다는 쿨 계열 미소녀를 동경해서
주인공을 적대하는 캐릭터로 등장하죠.
타에코의 불행은 주인공을 동경하는 캐릭터에 공략 가능 캐릭터였다는 겁니다.



스토리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캐릭터입니다.
다른 캐릭터들의 스토리는 패턴이 다들 비슷하지만
타에코의 스토리는 패턴이 유의미하게 다른 점이 보이죠.

쇼코랑 억지로 친한 척하면서 주인공과 엮이기도 하고,
쇼코에게 눈치없이 막말을 하기도 하는데
다른 스토리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게임의 독특한 점은 바로 35개에 달하는 엔딩 개수입니다.
쇼코 엔딩은 무려 일곱 개가 있으며,
가장 적은 타에코 엔딩도 세 개는 되죠.
각각 캐릭터에게는 ㄴㅇ이 끼어 있는 배드 엔딩도 있는데
대다수의 엔딩들은 의미가 없이 숫자 불리기 식의 엔딩입니다.



담임 선생 캐릭터인 시오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시오리는 주인공의 상처를 이해하고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자애로운 선생님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을 자신의 차에 태워 주기도 하고,
주인공을 껴안아 주기도 하죠.

근데 시오리는 과거의 일로 학교 부이사장에게 찍혀 있는 상태였죠.
부이사장은 시오리가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모함을 하여
학교는 시오리에게 근신처분을 내리고 쫓아내려고까지 합니다.

이 때 플레이어는 용기를 내서 선생님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에게 오히려 민폐가 되니 사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는 선택지를 구하면,
주인공은 세리나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모아서 항의 서명을 받기도 하고,
지지자를 모으는 운동 등을 벌입니다.
하지만, 시오리는 주인공에게 오히려 피해가 갈 걸 우려해서
학교를 그만둘 것을 결정하게 되죠.
주인공은 학교를 그만두는 시오리를 설득하려 하는데,
시오리는 자신이 주인공에게 진짜로 마음이 없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선생을 그만두기로 했던 겁니다.
그런 식으로 여러 고민들이 교차하면서 둘이 맺어지게 된다는 스토리죠.



해피 엔딩 스토리 자체는 그럭저럭 잘 짜여져 있습니다.
이게 모두 주인공이 중요한 시점에 용기를 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주인공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선택지로 돌아가 다른 선택지를 골라 봅시다.



주인공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이 힘을 합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걸 본 주인공은 자신도 시오리를 구하는데 힘을 모으겠다고 결의하게 되죠.
그 결의를 마지막 장면으로 엔딩입니다.
더 이상의 뒷내용 따위는 없어요. 그냥 끝입니다.

선택지형 멀티엔딩 게임에서 중요한 건
이 선택지를 고르면 과연 어떻게 될까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항의 운동에 주인공이 빠졌다는 건 결과가 아니에요. 과정이죠.
항의 운동에 주인공이 빠짐으로써
주인공과 시오리의 관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상황 등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줬어야 합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어요.

해피엔딩과 이 엔딩의 차이점이라고는
해피엔딩은 끝까지 보여줬고,
이 엔딩은 별 이유도 없이 중간에 스토리를 끊어 버렸다는 점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비극으로 끝났다면 모를까 이건 그냥 애매한 엔딩일 뿐이죠.
진정한 의미의 배드 엔딩입니다. 안 좋다는 의미의 배드요.

이 게임은 이런 식의 엔딩으로 수십 개의 엔딩을 만들어 낸 겁니다.
아이디어가 넘쳐서 엔딩을 많이 만들자고 기획한 게임이 아니라
엔딩을 많이 만들자는 기획이 먼저 있고, 어떻게든 엔딩 숫자를 채우려고 한 것처럼 보여요.



무엇보다도 메인 캐릭터들의 스토리들조차도
중복되는 장면이 많고, 읽은 문장 스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지루한 면이 있습니다.

엔딩이 그냥 7개였어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을 게임인데
무려 35개를 만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단순히 엔딩이 많다는 점이 비판받을 건 아닙니다.
90년대에는 수많은 엔딩을 가진 게임이 많이 나왔었죠.

근데, 그 시절에는 스토리를 끝맺는 방법의 스펙트럼이 넓었어요.
캐릭터가 자살한다거나, 어디론가 사라진다거나, 주인공 배를 찌른다거나 하는
막장 엔딩들도 많았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자극적인 엔딩들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이 게임도 그런 자극적인 엔딩들을 넣지 않은 건 괜찮았다고 보지만,
그 부족분을 어떻게 채우겠다는 생각 없이 엔딩을 이렇게 많이 만들면 안 되잖아요.
그냥 귀찮은 게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총평하자면, 메인 스토리만으로 보면 적당히 할 만한 게임입니다.
발매 시기를 고려해도 약간 고전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왕도 스토리가 대부분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엔딩이 많긴 하지만 골수 엘프 팬이 아닌 이상 굳이 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골수 엘프 팬이었지만
세리나와 쇼코 스토리 정도나 일곱 캐릭터의 해피 엔딩정도면 보겠다면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