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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리뷰 : 미카구라 소녀탐정단(1998/9/17,휴먼)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에 엘프 사에서는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에로게를 발매합니다.
98년도에 휴먼이라는 회사에서 발매한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시리즈의 새로운 속편을 발매한 거죠.
예전에 한 번 이 게임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런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는 나중 리뷰에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 발매되기 전까지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게임에 대해 잘 몰랐죠.
엘프 사에서 저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는지
<신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에는
<미카구라 소녀탐정단>과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
두 게임의 윈도우 이식판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리뷰하는 게임은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지만
휴먼 사에서 발매한 PS1용 게임이 아니라 엘프 사에서 동봉한 윈도우용 게임이고,
PS1용 게임에 대해서는 주요 변경점만을 언급할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은 소문난 명탐정 미카구라 토키토와
그의 조수들인 카노세 토모에, 쿠미야마 시게노, 히가키 치즈루라는
세 소녀의 활약을 그린 옴니버스 탐정물입니다.

플레이어가 주로 조작하는 것은 여조수 셋이고,
미카구라는 해결편 쯤에 등장해서 폼 잡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토리만 봤을 때는 역사에 남을 수준의 게임은 아니었으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스템인 '트리거 시스템'으로 유명한 게임이었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우선 트리거 시스템에 대해 분석해 보기로 하고,
스토리나 캐릭터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 보도록 하죠.



게임 화면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아이콘을 선택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외 장소 이동이나, 특정 장소에서 포인트 클릭 시스템 등이 있지만
그다지 중요한 점은 아닙니다.



평범하게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이 없죠.



그런데 가끔 대사 도중에 대사가 파란색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있고,
대화창 위에 방아쇠 모양의 '추리 트리거'가 표시됩니다.
파란색의 대사 중에서 수상하거나 좀 더 조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추리 트리거를 클릭하면 되는 겁니다.
정답이라면 '탕'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추리 포인트가 올라가고,
오답이라면 '푸슉'하는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오며 총알만 낭비하게 됩니다.

옛날 게임에서 대사 하나하나에 대해 캐묻거나 모순을 지적하는 등의 행위는
오로지 게임 캐릭터들의 몫이었습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들을 조종하면서도 
장소 이동이나 범인 선택 등의 제한적인 플레이만 가능했죠.  
중요한 부분인 탐정의 솜씨 파트에서는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게임은 그 행위를 플레이어가 직접 할 수 있도록 만든 겁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시스템이었죠. 


하지만,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라는 이 게임의 존재조차 모르는,
수많은 분들에게도 이 트리거 시스템은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바로, <역전재판> 시리즈와 <단간론파> 시리즈에서 사용된 방식이기 때문이죠.

이 시스템의 원조가 바로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두 게임의 제작진이 이 시스템의 뿌리는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에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전재판>, <단간론파> 시리즈와 이 게임은 상당히 차이점이 많은데,
대표적인 차이점은 이 게임은 재판이 아닌 수사과정이 메인이라는 점입니다.

범인을 밝히는 해결편에서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미카구라 탐정이 범인을 추리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죠.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에서는 선택지를 통한 추리가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수사 과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점은 두 게임의 진행 방식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역전재판>, <단간론파> 시리즈는
주로 고의 혹은 무의식적으로 위증을 하는 범인, 증인들의 수상한 증언에 
이의를 제기하고 몰아 붙이면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하죠.

반면에, 미카구라 소녀탐정단은 모순되지 않고, 이상하지도 않은 평범한 증언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못 들어본 이름이나 처음 듣는 이야기, 그리고 수사에 필요해서 기억해야 할 이야기같은
비교적 사소한 이야기까지 지적을 해서 캐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형사가 말하는 "사망 추정시간은 8시에서 10시 사이야." 같은 대사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대사지만 탐정이라면 기억해야 할 정보입니다.
그럼 쏴야 하죠.

또, "그녀는 저래 보여도, 애인한테는 친절해요." 같은 대사는 정말 사소한 증언이죠.
하지만,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완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럼 쏴야 하는 거에요.
방아쇠를 당긴 후에야 그 애인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는 시스템입니다.



사소한 것까지 지적해야 하다 보니,
확실한 모순을 잡아 내는 것보다 게임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게임을 그렇게 날림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에 일리가 있지만
한 번 진행이 막혀 버리면 답도 없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게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장소가 많고, 그만큼 대사량도 많습니다.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수많은 장소를 다시 다 돌아 보고, 수많은 대사들을 다시 살펴 봐야 합니다.

아무리 살펴 봐도 이상한 대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더니
원래 빈 방이었던 곳에서 누군가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증인이 스토리 진행에 따라 갑자기 다른 증언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역전재판>, <단간론파>에서는 모순을 찾아 내야하는 대사의 범위가 명확하게 제한되지만,
이 게임에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무슨 대사가 문제인지 열심히 고민했는데
사실 듣도 보도 못한, 갑자기 나타난 대사가 정답이었다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또한, 범위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단번에 방아쇠를 당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증인 "주방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고 해."
탐정단 "약간의 소란?"
증인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고 하는군."
탐정단 "그 이유가 뭐죠?"

이 대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주방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정보입니다.
이 게임의 논리대로라면 방아쇠를 당겨야 할 타이밍이죠.

근데 오답입니다. 
굳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도 탐정이 알아서 캐묻거든요.
"비명을 질렀다"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답인 이유는 탐정이 알아서 캐묻기 때문이죠.

저 파란색 대사를 처음 본 상황에서는
저 대사가 오답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 대사 이후에 탐정의 대사를 들어야만 오답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역전재판>이나 <단간론파>에서는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일단 맨 처음부터 끝까지 추리해야 하는 대사 전체를 한 번 들려 줍니다.
근데 이 게임에는 그런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죠.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정말 의심스러운 대사가 아니라면
함부로 방아쇠를 당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총알을 꽤 넉넉하게 줬다는 점입니다.
화면 윗부분을 보면 추리 포인트는 16점, 남은 총알은 10발입니다.
정답을 맞추면 총알 한 발에 대체로 1~4포인트까지 올라가죠.

챕터 클리어까지 고작 4포인트 밖에 안 남았으니
최악의 경우에도 10발 중에서 6발은 틀려도 되는 겁니다.
운 좋으면 9번 틀려도 1발만에 클리어할 수도 있고요.
이 정도로 여유가 있으면 애매해도 한 번 쏴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가씨가 "새로 온 메이드도 파티 준비를 열심히 하는데 내가 쉴 수는 없어."라고 합니다.
새로 온 메이드가 대체 누구죠? 한 번도 못 만났는데요.
안 되겠습니다. 쏩시다.

오답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니, 그 메이드는 우리가 잠입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속 미카구라 소녀탐정단 ~완결편~>의 시스템은 다소 아쉽습니다.
총알 실수까지 전부 계산해서 채점한 다음에
S~D까지 등급을 매기고 서비스 CG를 보여주는 시스템이 생겼죠.
S등급을 맞기 위해서는 에피소드 내내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애초에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을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 디자인이 아니에요.
사소한 부분도 잡아 내야 하고, 애매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이 명확하게 보이는 게임이 아닙니다. 

규정 횟수 이내에 모든 정보를 캐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이에요.
챕터 초반에 총알을 많이 낭비해서 후반에 쫄리기도 하고,
초반에 총알을 아낌으로써 후반에 여유있게 대처하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애매한 증언의 개수와 총알의 개수를 비교해 봤을 때,
총알이 많이 남아서 애매한 증언 전부에 쏴 볼 수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남은 총알을 운용하는 재미가 있는 게임인 겁니다.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은 99% S등급을 받을 수 없는 시스템입니다.
S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한 번 클리어하고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해야 하는데
그건 그냥 기억력 테스트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안 했어요.



단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불합리한 게임은 아닙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게임이고, 단점은 그 중에서 일부분에서만 드러날 뿐이죠.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만 보더라도 후대 게임들에 비하면
시스템 운용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보이는 게임입니다.
혁신적인 시스템이었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역전재판>에 넘겨줘야만 했죠.

물론 시스템 운용 탓만은 아니고, 운도 안 따르기도 했습니다.
시리즈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 영향도 컸을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역시 다음 리뷰에서 이야기해야겠죠.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리뷰 : EVE rebirth terror(2019/4/25,El DIA)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EVE시리즈는 다섯 작품이었으며,
또다시 EVE시리즈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예상을 깨고 2019년,
플레이스테이션4 기종으로 <EVE rebirth terror>가 발매됩니다.


이 게임은 저도 이번이 첫 플레이입니다. 
처음 발매되었던 시기에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았죠.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어차피 <EVE burst error>를 비롯한 EVE시리즈는 
언젠가는 리뷰할 게임이었기 때문에 그 때가서 플레이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생각보다는 빨리 왔죠.

둘째로는 많은 EVE 속편들이 그래왔듯이
이 게임도 저를 실망시킬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리뷰를 쓸 생각이 없었다면 
이 게임을 아예 플레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할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 담당은 사카키 카사라는 라이터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눈 여겨 보고 있는 작가인데
<츠지도씨의 순애로드>, <츠요키스NEXT>, <비행기구름 너머>,
<금색 러블리체>, <마오텐>에 이르기까지
저는 이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에 호평을 했습니다.
2008년 이후로 제가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게임 수가 많이 줄었는데
사카키 카사의 작품들에는 이례적으로 괜찮은 평가를 많이 내렸어요.

사카키 카사는 재미있는 반전을 많이 활용했던 작가입니다.
과연 EVE rebirth terror에도 그의 좋은 점을 많이 드러냈을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2016년에 발매된 <EVE burst error R>의 요소를 많이 가져 온 게임입니다.
배경 CG 등을 유용했고, 시스템도 거의 똑같습니다.
다만, 95년도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 와서 
최신 게임으로서는 다소 불편한 감이 있었던 <EVE burst error R>와 달리,
rebirth terror는 명령 선택을 최소화했죠.
너무 많이 줄여 버린 감이 있어서 
게임의 중후반부는 선택지가 없는 비주얼 노벨 수준입니다.

옛날 스타일을 좋아하셨던 분들 께는 많이 아쉽겠지만,
쾌적하게 스토리를 감상하고 싶은 분들께는 적합한 시스템이죠.



이번 역시 주인공은 코지로와 마리나입니다.
시리즈 개근 캐릭터인 야요이도 당연히 등장하죠.

맨 오른쪽의 캐릭터는 <EVE Lost One>의 주인공 키리노 쿄코입니다.
<EVE TFA> 이후 오랜 만의 복귀인데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죠.
실력도 괜찮아져서 활약이 많이 늘었습니다.



또한 이번에도 여전히 히무로 쿄코나 본부장이 등장합니다.
워낙 당연히 등장해야 할 캐릭터들이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죠.



놀라운 부분은 <EVE burst error>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조연들도
상당수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위의 캐릭터는 카가와 미스미라는 캐릭터인데
제가 <EVE burst error> 리뷰를 할 때 저런 캐릭터를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별 비중이 없는 캐릭터였으니까요.

카가와 미스미의 경우는 플레이스테이션판 <EVE burst error 플러스>나
PSP판 <burst error -EVE The 1st.->에서
디자인이 나이 들어 보이게 뽑히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괜찮아졌습니다.
괜찮게 나왔던 PC-98판이나 <EVE lost one>보다도 더 훌륭하게 나왔어요.

딱히, 활용할 여지가 안 보이는 캐릭터가 디자인이 너무 잘 나와서
저는 코지로하고 의외의 커플링이라도 생기나하고 생각했죠.
뭐, 그런 건 없었습니다.

이런 캐릭터마저 재활용할 정도로 이 게임은
<EVE burst error>를 많이 활용한 게임입니다.



캐릭터나 스토리상으로도 시리즈에서 <EVE burst error>와 가장 가까운 게임입니다.
그동안 조금씩 변해왔던 코지로나 마리나의 캐릭터가
가장 오리지널에 가까워졌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또한, 코지로가 맡은 의뢰는 실종된 선생님을 수색하는 일인데
이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는 <EVE burst error>에 나왔던 그 외국인 학교죠.

스토리에 관계해서, 사실 저는 EVE 시리즈의 속편들이 
<EVE burst error>와 연결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
자연스럽고 멋있게 연결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대부분의 속편들은 <EVE burst error>와의 관계성에 집착한 나머지
고유의 스토리가 훼손되어 버리고 독창성이 부족했죠.


그래서 이번 rebirth terror 역시 중반부까지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눈길을 끌 만한 사건이 터지지는 않고
<EVE burst error> 시절을 계속 상기시켜 주려고 하는 이벤트만 일어났죠.

실종된 선생의 정체같은 건 별 대단치도 않을 텐데
너무 수수께끼를 질질 끈다고 생각했고,
히무로 쿄코같이 활약시켜야 할 인기 캐릭터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코지로가 찾을 때마다 안 보였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플레이했을 때 제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걱정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죠.

무엇보다 돋보이는 부분은 <EVE burst error>와 무작정 연결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걸 활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이죠.
이 아래부터는 이 게임에서 제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으로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리뷰를 더 이상 읽지 않을 것을 권장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게임은 
<EVE burst error>의 캐릭터를 상기시키는 수법을 많이 썼습니다.



마리나가 헬리곱터를 타는 장면입니다.
옆에 헬기 조종사는 누구일까요? 전혀 기억할 필요없는 엑스트라입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말로 자신은 <EVE burst error>에서도
마리나가 탄 헬기를 조종했던 사람이라고 설명하죠.

이런 정도에 그쳤다면 저는 이 게임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 위의 두 캐릭터는 대체 누구일까요?
<EVE burst error>에서 저 둘을 봤다고 하면, 그건 명백하게 거짓말입니다.
못 알아 보도록 스타일을 바꿔 왔다고 게임 내에서 얘기하거든요. 

저 둘의 정체는 바로 사라와 실비아였습니다.
<EVE burst error>를 정말 열심히 플레이하지 않았다면
'사라와 실비아가 대체 누구야?'라고 하시는 게 정상입니다.



가짜 코우에게 안겨있는 저 두 여성이 바로 사라와 실비아입니다.
<EVE burst error>를 플레이하신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저 장면과 딱 한 장면 더 등장하며 대사 몇 마디 없는 그냥 병풍이에요.
밥솥의 밥풀 하나까지 싹싹 긁어 재활용한다는 심정으로 재등장시킨 겁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을 '사실 얘가 걔였습니다'라는 반전으로 활용한 거죠.
이 게임에서는 이런 반전을 매우 많이 사용했습니다.
예측불허의 놀라운 반전이 많았죠.



가장 알기 어려운 반전은 왼쪽의 남성입니다.
이치구사 유우마라는 외국인 학교의 보건 선생인데
중반부까지는 뭐하는 캐릭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캐릭터죠.

그러다 갑자기 하이라이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코지로를 위기에서 구해 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 주는 걸까요?


사실 그의 정체는 히무로 쿄코의 예전 직장 동료로
교육감시기구의 잠입수사요원 사쿠마 유이치입니다.
히무로 쿄코와 함께 일한 적도 있는 캐릭터죠.
저는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도 누군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쿠마의 약혼녀는 마츠노라는 캐릭터인데 그녀는 지금 유학을 간 상태라고 합니다.
마츠노가 누구인지는 제 리뷰에서 이미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EVE burst error>에서 등장하여, 도서관에서 코지로와 마리나를 도와줬던 그 캐릭터죠.
그리고 그 때 리뷰에서 마츠노는 <열락의 학원>의 등장인물이었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저 위의 남자의 정체는
<열락의 학원>의 메인 히로인인 마츠노와 맺어진 캐릭터이자
<열락의 학원>에서 히무로 쿄코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캐릭터로
바로 <열락의 학원>의 주인공 사쿠마 유이치였던 겁니다.

굉장히 놀라운 반전이었죠.
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캐릭터의 등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반전에는 문제점도 있는데
눈치채기 너무 어려운 반전이라는 점이죠.
제가 리뷰를 위해 이번에 EVE시리즈를 순서대로 복습하지 않았다면
저조차도 이 반전을 놓쳤을 겁니다.

<EVE burst error>는 95년도 게임이고 <열락의 학원>은 94년도 게임입니다.
그리고 rebirth terror는 무려 23년,24년 후에 발매된 게임이에요.
<EVE burst error>면 몰라도 <열락의 학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캐릭터가 정체를 공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치 복면가왕에서 '가면을 벗어주세요~' 했는데,
가면을 벗어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과 똑같지 않을까요?

반전이 너무나도 매니악했어요.
웬만한 시리즈 팬이 아니라면 나중에 해설이나 봐야 눈치챌 반전이었습니다.
이 게임에 나오는 반전은 놀라웠지만
<EVE burst error>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 놓칠 수 있는 반전이 너무 많아요.
옛날 작품들을 플레이하는 게 필수적입니다.



이런 '이 캐릭터의 정체는 누구' 패턴의 반전은 괜찮았고
사쿠마 유이치의 반전은 특히 놀라웠지만,
사실 가장 놀라운 반전은 마지막 장면에 있습니다.

이 반전만큼은 제 리뷰에서 이야기 안 할 겁니다.
이건 게임을 플레이하시고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제 반응은 '미친 거 아니야?'였습니다.



총평하자면, 게임 자체는 역대 EVE 시리즈 속편 중에서 가장 깔끔하게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뭣보다 미완성, 졸속 결말이 많았던 시리즈 전통을 깨버리고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준 점이 마음에 듭니다.

다만, 발매시기는 별로 안 좋았다고 봅니다.
이런 게임은 20년 전에나 나왔어야 합니다.
지금에 와서 <EVE burst error>에 가장 근접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
저에겐 먹혔지만 신규 팬들에게도 먹힐지는 잘 모르겠네요.

전작과 연결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미흡한 점이 있었고
저도 이 게임 딱 하나만 보고 평가했다면 
기대보다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평가를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2022년 4월에 사카키 카사의 시나리오로
<EVE ghost enemies>라는 새로운 속편이 또 나옵니다.

rebirth terror가 지금까지 혼란스러웠던 EVE시리즈를 정리하고,
앞으로 계속 나올 EVE시리즈의 첫 스타트를 끊는 역할이었다는 예상 하에
자기 몫을 다 한 훌륭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내리겠습니다.

<EVE ghost enemies>는 발매되면 바로 플레이하고 싶을 정도로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이게 다 rebirth terror덕분이죠.

2021년 12월 12일 일요일

리뷰 : EVE new generation(2006/8/31,카도카와서점)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VE 시리즈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시즈웨어는
결국 <EVE ZERO>를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에서 손을 놓아 버립니다.
6년 후, 시리즈 다음 작품이 발매되는데
바로 카도카와서점에서 플레이스테이션2용으로 발매한 <EVE new generation>이었습니다.
이후 TYRELL LAB이라는 F&C계열 회사에서 윈도우용 성인 게임으로 이식했죠.


이 게임은 어느새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으로,
EVE시리즈를 플레이하고자 하시는 분들이 플레이를 도전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네, 이 게임 플레이하세요. 
저라고 맨날 게임 욕만하고 싶겠습니까? 칭찬할 때도 있어야죠.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늘 관대한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VE 시리즈의 속편들이 지나치게 수준 이하였을 뿐이죠.



사실 이 게임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게임입니다.
장점만큼이나 문제점도 많은 게임이죠.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에도 부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new generation. 너무 새로웠던 거죠.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시리즈와의 차이점은
스토리의 템포가 빠르다는 점입니다.
코지로는 게임 시작하자마자 총격전을 벌이고,
마리나는 게임 시작하자마자 테러 계획 고백 후 자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죠.

시리즈의 다른 게임들은 초반부가 다소 느슨하게 진행됩니다.
<EVE burst error>만 해도 코지로가 맡았던 사건은 유실물 수색,
마리나가 맡았던 사건은 외교관 딸 호위였죠.

완전 별개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사건들이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예상치 못한 접점을 갖게 된다는 구성은 EVE 시리즈의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통은 양날의 검이었는데
<EVE burst error>처럼 중후반부의 스토리 밀도를 폭발적으로 향상시킬 수도 있었지만,
후반부 전개가 빈약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부실한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몇몇 게임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new generation은 그런 전통을 깨 버리고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그에 발맞춰 시스템도 바뀌었는데,
플레이를 피곤하게 했던 쓸데없는 맵 이동을 최소화하고 
시점 변환 타이밍을 대놓고 알려주는 방식을 택했죠.



플레이 시간을 쓸데없이 늘려 버렸던 맵 이동이 간소화되면서
게임 플레이가 쾌적해졌느냐?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분들은 이 게임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했죠.
맵 이동은 없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귀찮은 일을 강요했던 겁니다.

PS2에서는 방향키와 버튼을, 윈도우판에서는 마우스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는데
특히 윈도우판이 엄청난 비판을 많이 받았죠.
PS2 패드에는 버튼이 많았지만 마우스에는 버튼이 몇 개 없으니까요.

시스템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조사한다', '대화한다', '기타' 커맨드 중 하나와
중앙 혹은 상하좌우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었죠.

문제는 그 시스템의 운용이었는데
단순한 대화를 하는데도 '대화한다' 커맨드 뿐만 아니라
'조사한다', '기타' 등을 계속 눌러줘야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무슨 커맨드를 어떤 때에 활용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 본인들도 혼동했는지 처음 보는 인물을 소개할 때, 
어떤 때는 '조사한다' 커맨드를 눌러야 했고,
또 어떤 때는 '기타' 커맨드를 눌러야 했어요.

게다가 상당수의 경우에 불필요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화'는 사람하고만 하면 됩니다.
근데 그 '대화하다' 커맨드를 상하좌우 다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죠.

'천장하고 대화를 왜 함?', '바닥하고 대화를 왜 함?'
이런 멘트가 게임 내내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데
애초에 이런 커맨드들을 안 만들었으면 되잖아요.
저도 천장하고 대화하기 싫어요. 
근데 게임이 진도가 안 나가니까 있는 커맨드들을 다 눌러볼 수밖에 없는 것뿐이에요.

 

다시 스토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게임은 스토리가 초반에만 치고 나가고 중반부에 느슨해지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미스테리한 일이 벌어지죠.

코지로가 보호하고 있는 노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언제, 어디로 순간이동을 할 것인지는 본인이 정할 수는 없고
비자발적으로 갑자기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고 하네요.



첫 번째 장면, 코지로는 야요이에게 노이를 맡겨 놓았는데
노이가 탈출구가 없는 화장실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두 번째 장면, 경찰 병원에서 보호하고 있던 노이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경찰 관계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감시를 뚫고 말이죠.
마리나가 관계자들을 추궁하지만 감시원들조차 사라진 방법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세 번째 장면, 코지로는 MRI 촬영 때문에 노이를 병원으로 데려갑니다.
노이를 MRI실에 두고 코지로와 의사는 옆방에 있었는데
몇 초간 정전이 된 틈에 노이가 또 사라집니다.
출구라고는 코지로가 있던 옆방 밖에 없었는데 말이죠.



네 번째 장면, 코지로는 알토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는 걸 틀림없이 봤습니다.
근데 엘리베이터가 지하까지 내려왔을 때, 알토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죠.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마리나는 수레에 숨어 있어서 바깥 상황을 알 수 없었으나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알토가 중간에 내리지 않았던 것도 확실합니다.



다섯 번째 장면, 마리나 시점에서
에피라는 여성이 마리나를 순간이동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마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아무 장소나 이야기하죠.
근데 정신이 들어보니 어느새 그 장소에 와 있습니다.

코지로 시점에서 코지로는 마리나와 에피의 대화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총소리 때문에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마리나가 사라져 버리죠.
그 장소에는 에피만이 남아 있었고 유일한 출구는 코지로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순간이동에 관해 다양한 미스테리가 펼쳐지는데 놀랍게도
이 게임의 메인 테마는 순간이동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쌍둥이 간의 기억 공유, 집단 기억상실, 타임 리프 등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게임의 분량에 비해 미스테리한 사건이 너무 많이 벌어질 뿐더러
이 사건들이 한 호흡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제각기 다른 트릭들이 사용되고 있죠.
게다가 현실성도 없고, 억지스러운 트릭도 꽤 많이 사용되고 있어요.

이렇다 보니, 내용이 너무나도 산만해집니다.
중간중간에 사건을 정리하는 시간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지만
그조차도 부족합니다.
게임 내내, 현란한 사건을 계속 터뜨리면서 
세세한 점이 부실하다는 걸 덮어 버리는 수법을 쓴 거죠.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 스토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를 위해 2회차 플레이를 한 사람들은 이 게임의 속임수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캐릭터 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코지로와 마리나를 제외하면 이전 작품들과 연관되어 있는 캐릭터는
야요이, 본부장, 히무로 쿄코 셋 뿐인데
야요이와 본부장은 후반부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히무로 쿄코는 까메오 출연급으로 짧은 활약만을 보여줍니다.
코지로와 마리나의 캐릭터도 어색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우치코시 코타로로 그의 대표작은 <EVER17>입니다.
이 게임이 듣는 가장 많은 비판은 우치코시의 색깔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점이죠.
우치코시의 방식이 무조건 틀린 건 아니고 단점만큼 장점도 존재하지만
EVE의 레귤러 캐릭터들은 캐릭터성이 확연히 죽어 버렸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게임이 호불호가 갈리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이 게임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나,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이나
'이 스토리를 굳이 EVE로 만들 필요가 있었나'하는 의문을 제기하죠.



상술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게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멀티 시점을 활용한 트릭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말씀드렸던 순간이동 트릭 중 일부도 
코지로의 시점과 마리나의 시점이 결합함으로써 미스테리가 완성되었죠.
또한 코지로와 마리나, 둘이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을 생각했었다는 서술 트릭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지로는 마리나의 살인 장면을, 
마리나는 코지로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다는 장면이 훌륭했습니다.

트릭이 거칠고, 억지스럽고, 편의주의적이었던 건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짧은 한, 두 장면에 걸친 게 아니라
여러 장면에 걸쳐 몇 번이고 살인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멀티 시점을 이용하려는 의지를 확실히 드러냈죠.

많은 EVE시리즈의 속편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만 있었을 뿐,
스토리 진행 도중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죠.



하지만 new generation은 멀티 시점 활용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무리수를 많이 두었지만 각 장면들은 화려했으며,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트릭들도 많았지만 EVE의 시스템과 어울렸습니다.
너무 많은 트릭들을 한꺼번에 넣어 스토리를 산만하게 만든 문제점은 크지만,
그만큼 시스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활용에 대한 의욕이 높았다고 평가합니다.



총평하자면, <EVE burst error>에 큰 애정을 갖고 계신 분들이나
작품 내에 쓰인 트릭을 진지하게 추리할 생각이신 분들은 즐길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전작들과는 완전히 단절된 작품으로 봐야 옳고,
설명이 안 된 미스테리는 없지만 몇몇 트릭은 SF 수준으로 무리한 트릭이었죠.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만 소개해도 리뷰 몇 편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결말까지 끌고 가서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EVE 시리즈치고는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포함되었고 개중에는 감탄할만한 트릭도 있죠.

전체적으로 즐길 요소 자체는 다른 쓰레기 속편보다 월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VE burst error>는 물론, <EVER17>과도 비교되면서 까이는 작품인데
그런 역대급 명작들과의 비교는 너무 가혹하지 않겠습니까?


나름의 인기를 끌었고, 그 여세를 몰 생각이었는지
<EVE작>이라는 캐릭터를 활용할 탈의마작 게임도 만들어졌습니다.
<EVE작>은 호불호 갈리고 그런 거 없이
만장일치로 쓰레기통에 쳐 박히고 말았지만요.

2021년 12월 5일 일요일

리뷰 : EVE ZERO(2000/3/30,시즈웨어)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VE 시리즈의 네 번째, 혹은 관점에 따라 세 번째 작품인
<EVE ZERO>입니다.
플레이스테이션판으로 먼저 발매되었으며,
이후 추가 요소를 넣어 PC판, 드림캐스트판이 차례로 발매되었습니다.

끈질기지만 이 게임 역시,
EVE 시리즈를 플레이해 보고 싶은 분들이
세 번째로 버려야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제만 해도 ZERO, 없는 셈 쳐야 하는 게임이라는 거죠.

사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으로
괜찮다는 평가를 내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EVE The Lost One>보다는 낫다는 평가가 많이 있는데
이게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 수 없네요.



주인공은 코지로와 마리나로
<EVE burst error> 시기의 2년 전 사건을 다룬 프리퀄격 게임입니다.
애초에 <EVE burst error>는 속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게임이며,
프리퀄 작품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기획 자체가 게임 스토리에 제약을 많이 거는 기획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할 캐릭터를 죽일 수도 없었고,
<EVE burst error> 시점에 처음 만난 히무로 쿄코 같은 
인기 캐릭터를 등장시킬 수도 없었죠.

가장 큰 문제는 <EVE burst error>에서 처음 만나는 두 주인공,
코지로와 마리나가 ZERO에서는 게임 내내 한 번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캐릭터의 상호작용이야말로 EVE 시리즈의 독특한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저에게 있어,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죠.



<EVE burst error>에서는 코지로와 마리나가 아직 모르는 사이일 때,
익명의 협업을 통해 명장면을 연출한 바 있죠.
ZERO에서도 의지만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둘이 절묘하게 엇갈리는 장면을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아쉽지만 상호 협력하는 장면은 
목소리도 안 들리는 곳에서 서로 문 두드리는 장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럴 거면 그냥 만나는 장면이 아예 없는 게 나은 수준이에요.



물론 2년 전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단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코지로와 마리나의 풋풋했던 시절을 보여줄 수도 있었겠죠.
아쉽게도 이 게임에서는 그런 요소가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대체로 다른 시리즈와 별 차이가 없게 묘사되었죠.

실력적으로는 어설프고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건 캐릭터가 미숙하다기 보다는 작가가 미숙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EVE burst error>의 스토리와 연결되는 클론을 소재로 다루었는데
이 역시 안 다뤄도 별 관계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스토리상 모순만 생겼다고 비판하는 분들도 계시죠.



이런 저런 문제 속에서도 ZERO를 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캐릭터입니다.
<EVE burst error>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상당수가 그 작품에서 사망했죠. 속편에 등장할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년 전 시점을 다룬다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로워지는 거죠.
대표적인 캐릭터로 아카네가 있습니다.
사실 아카네는 죽지 않았지만 어쨌든 <EVE burst error>에서 큰 일을 당했고,
그 때문인지 후속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못했죠.
하지만 ZERO에서는 멀쩡히 등장합니다.

아카네 캐릭터는 그럭저럭 잘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의 역할 자체가 감초 역할로 한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력적이었어요.



재수없는 라이벌, 니카이도 역시 ZERO에서 등장했습니다.
주인공이 맡은 사건에 억지로 끼어 들어 본인이 먼저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이 게임에서도 야요이를 짝사랑하는 포지션으로 나오는데
<EVE burst error>에서는 숨은 속셈도 있었고, 비열한 성격도 많이 보여줬지만
ZERO에서는 야요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순수한 이미지로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사실 그럴 수 있죠.
왜냐면, 2년 전 이야기니까요. 
2년이면 순수했던 사람이 세속적인 야심가로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ZERO에서 니카이도가 흑화한 계기를 넣었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코지로와 대결에서 패배하고 그에 따른 열등감을 보여 주는 식으로 말이죠.

근데, 그런 부분이 없을 뿐더러
중반부부터는 아무 이유도 없이 등장도 안 해요.
스토리 만들다 니카이도 까먹었나 할 정도로 갑자기 사라집니다.



겐자부로의 캐릭터 활용도 아쉬웠습니다.
이 분은 니카이도와 달리 그래도 인사라도 하고 사라지는데
캐릭터의 매력에 비해 활약 기회가 너무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뭔가 하나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역할은 애매한 신 캐릭터가 했죠.



개인적인 평가로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얻은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컸다고 봅니다.
이득을 극대화할 방법도 있었고 손해를 최소화할 방법도 있었지만
이 게임은 그런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죠.

프리퀄 게임을 기획하면서 그 기획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과거 시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제 평가가 좀 더 올라갔을 겁니다.



프리퀄을 감안하지 않았을 때,
ZERO 자체의 스토리는 중반까지 그럭저럭 할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루스나 토아 등의 새로운 캐릭터들은 꽤 매력적이었어요.



신 캐릭터의 경우는 <EVE burst error> 시점까지
살아있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었는지 그냥 다 죽여 버립니다.
스토리상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퇴장시키기 위한 죽음일 뿐이에요.

왜 꼭 죽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년동안 서먹해졌다고 하면 되잖아요.



마지막에 다 폭파시켜서 해결하는 엔딩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코지로, 마리나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았을 뿐더러
탈출 역시 너무 억지스러웠죠.

그래도 허술하고 졸속으로 전개되는 마무리는
EVE 시리즈 전통이기 때문에 그냥 무난하게 봐 줄만한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다른 EVE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아쉬움이 가득한 게임이었습니다.
다양한 시도를 해 보고 있긴 한데 그다지 안정적이진 않아요.
시리즈의 장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최고의 게임인 <EVE burst error>와
많은 사람에게 최악으로 남아있는 <EVE The lost one>을 제외하고
ZERO와 TFA 중에 뭐가 더 좋은 게임인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것 같습니다.

미완성이라도 EVE 시리즈 특유의 감성을 원하시는 분께는 TFA가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원하시는 분께는 ZERO가 더 맞다고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원하시는 분은 둘 다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