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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일 일요일

리뷰 : 디그(1995/11/30,루카스아츠)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스아츠에서 발매한 <디그>입니다.
원래는 게임이 아닌 영화나 TV 에피소드로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스토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발되었습니다. 무려 풀더빙입니다.
다만 번역질이 낮다는 의견이 많았고
더빙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지구에 충돌 위험이 있는 소행성 폭파 작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엄선된 정예 멤버가 소행성을 폭파하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나가게 되죠.

이 게임이 나왔던 90년대는 왠지 소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설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 소년동아에서 봤던 '지구를 위협하는 소행성'만 몇 개였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단 하나도 지구에 도착하지 않았네요.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운석 충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영화인 <아마게돈>이나 <딥 임팩트>가 대표적이었죠.
시기가 좀 다르지만 에로게로는 <그리고 내일의 세계에서>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위의 세 작품 중에서 저는 <아마게돈>은 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마게돈>은 지구를 위협하는 운석을 폭파하는 과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의 세계에서>는 운석 폭파같은 블록 버스터 없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에로게였죠.
<딥 임팩트>는 양쪽 스토리를 모두 묘사한 중간 정도의 영화였습니다.

처음 디그를 보았을 때, 이 게임은 과연 셋 중 어떤 작품과 가까울까를 생각했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이라면 아무래도 <아마게돈>식 스토리가 가장 어울리겠죠.
결론부터 말하면, 셋 다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소행성은 단순한 소행성이 아니라 외계에서 보내 온 우주선이었던 겁니다.
폭파를 진행하던 주인공 일행은 우주선과 함께 머나먼 우주 저편으로 가게 됩니다.
정체 모를 별에 착륙한 주인공 일행이
별에 남아 있는 외계 문명을 탐사하는 게 이 게임의 기본적인 스토리입니다.

주인공은 이번 작전의 대장인 보스톤 로우라는 인물입니다.
군인 출신으로 그에 걸맞는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지만 별 소용은 없습니다.
대원들이 말도 더럽게 안 듣고, 대장에 대한 존경심도 그다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원들은 둘이 있는데 '기자'인 여성대원 메기와
'지질학자'인 남성대원 브링크입니다.
틀림없이 이들을 우주로 날려 보낸 이유는 
지구로 다가오는 소행성을 폭파하는 중대한 임무를 위해서였을 텐데,
왜 전문 우주항해사들이 아닌 저 둘이 선택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외계 문명 탐사에 있어서 저 둘의 능력과 지식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둘에게는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게임 초반 주인공이 혼자 네, 다섯 군데나 삽질을 하며 아이템을 발견하는데
대원 둘은 자신이 도와 주겠다는 형식적인 대사조차 안 치고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마지막에 중요한 발견을 할 분위기가 되면
그제서야 지질학자가 자신이 대신 삽질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지질학자에게 삽을 맡기고 얼마 되지도 않아
지질학자가 구덩이에 빠져 사망하고 맙니다.
이래서 부하들에게 뭘 맡기질 못합니다.
지금까지 주인공이 모든 고생을 다 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대장이 대원을 함부로 굴려서 죽었다고 하겠죠.
마침, 옆에 기자도 있습니다.

사실, 지질학자에게 동정심이 들기도 합니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위대한 사명을 띠고, 인류를 대표하여 우주로 나오면서
그 어떤 죽음도 각오했을 겁니다.
소행성 폭파에 휘말릴지도 수도 있었고, 우주선 착륙 사고가 있을 수도 있었으며,
광활한 공간에 낙오되어 우주 미아로 사망할 수도 있었겠죠.
근데 삽질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음이라니 이 얼마나 모양 빠지는 죽음입니까?
NASA에 이걸 어떻게 보고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찾아낸 지하에는 상당히 진보한 문명 유적이 있었습니다.
기자는 신나서 유적을 조사하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혼자 아이템도 찾고 퍼즐도 풀어야 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유적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아이템은 바로 빛나는 크리스탈입니다.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놀랍게도 사망한 지질학자가 부활하게 되죠.
평범한 부활 아이템 정도가 아니라
뼈밖에 없는 생물조차 뼈를 잘 맞추고 크리스탈을 사용하면 
새 살이 돋아나며 되살아나게 된다는 드래곤볼급 아이템입니다.



되살아난 지질학자는 이상할 정도로 크리스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데
사실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완전 개사기 부활 아이템이잖아요. 누구라도 눈 뒤집힐 상황 아닙니까?

게다가 지질학자는 부활 전에도 대장을 별로 존중하지도 않았고 
대놓고 막말을 일삼는 대원이었습니다.
이전에 비해 더 과격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이건 세 사람이 사회의 법과 규율에서 벗어난 곳에 조난되었기 때문이죠.
무인도에서 정신줄 놓고 폭력적이 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계급장을 떼어 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무법자가 되었을 뿐이죠.

공식적으로는 크리스탈의 부작용으로 사람이 변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저는 그냥 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드러났을 뿐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지질학자는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주인공의 탐험을 방해하는 역할입니다.



방해가 없더라도 꽤 어려운 난이도의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이 게임을 명작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난이도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죠.

개인적으로도 난이도가 높다는 점에 동의는 하지만,
이 게임이 특별히 독보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 서양권의 많은 어드벤처 게임이 이 정도 난이도는 있었다고 봐요.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어드벤처 게임은
영국에서 만든 <인첸티아의 저주>라는 게임입니다.
삼성 컴퓨터를 살 때 번들로 끼워 줬던 거죠.

당시에는 제가 어리기도 했지만
애초에 게임 난이도가 쉬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유명한 게임이 아니다 보니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클리어했습니다.
다른 게임을 구하기도 힘이 들었고, 달리 컴퓨터로 뭘 할 게 없었기 때문에
심심하면 켜서 진도가 나가든 안 나가든 온갖 짓을 다 해보고 그랬죠.
플레이 타임이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 엔딩을 보는데 1~2년은 걸렸을 겁니다.

그 후에도 여러 옛날 어드벤처 게임을 접했는데
그보다 어려운 게임도 많았습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게임 투성이었죠.
많은 게임들이 높은 난이도에 힌트도 부실해서
한참을 걸려 플레이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린이가 컴퓨터를 사는데 그런 게임을 끼워주다니 정말 잔인한 어른들이었습니다.
그 때 같이 줬던 <레이맨>이라는 액션 게임은 19년이나 걸려서 깼어요.


아무튼 디그의 난이도는 무자비하게 어렵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상당수의 어드벤처 게임 스타일이 언젠가는 클리어하겠지라는
마음으로 인내했어야 됐어요.

아쉬운 점은 주인공이 갈 수 있는 장소가 점점 넓어지는데
적절한 제어가 없었다는 점이었죠.
그것만 있었더라도 게임이 좀 더 쉽게 느껴졌을 겁니다.



이 게임의 장점이라고 느껴지는 점은
애니메이션으로 되어있는 컷씬과 현란한 화면 효과입니다.
옛날 게임이다보니 퀄리티를 아쉬워 하는 분도 있을 수 있고,
취향이 아니라는 분도 있을 수 있지만
게임 무대의 장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훌륭한 장치였습니다.



마지막이 되어, 주인공이 행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은 줄 알았던 두 대원이 살아 돌아오게 된다는 결말입니다.



온갖 만행을 일삼던 지질학자가 갑자기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데
지구로 돌아갈 때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회로 복귀할 생각을 하니 분노조절장애가 저절로 치료되는 거죠.



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갑자기 껴안으면서 친한 척을 합니다.
기자는 후반부에 주인공을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둘이 이 정도 사이까지는 아니었는데요.

지구로 돌아가서 대원들을 어떻게 처분할지는 주인공만이 알겠죠.


총평하자면, 영화로 나왔다면 좀 더 간결하고 심오한 주제를 잘 전달했을 스토리였을 겁니다.
하지만, 게임으로 하니 중간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랬는지 
그런 주제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어요. 스토리는 평범했다고 봅니다.
게임의 화면 효과와 영상미 등은 충분한 볼거리였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으로서는 난이도가 높은 편입니다.
저도 난이도 때문에 이런 부류의 게임을 기피하는 편인데
이런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게이머들에게는 충격적인 난이도일 수도 있겠죠.

올드한 게이머나 매니악한 분들께는 충분한 명작이 될 가치가 있는 게임이지만
최근에 어드벤처 게임을 입문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추천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댓글 11개:

  1. 90년대 후반에 나왔던 작품(게임을 포함한 미디어물 전반적으로)들은 세기말 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기술이 발전해도 표현할 수 없는 저 시절만의 특수한 감성이 있는거 같습니다. 소행성 충돌이라는 소재때문인지 플레이 해보진 못했지만 디그 리뷰글 보면서도 그런 감성이 느껴졌던거 같네요


    Zyx 사의 트와일라잇 호텔 리뷰 요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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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
    제가 루카스아츠의 어드벤처 게임을 거의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 자체에 평가를 내리는 건 주제넘은 짓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난이도 때문에 엔딩을 본 게임은 많지 않습니다만
    말씀하신 룸같은 경우는 그 아이디어를 보고 상당히 감탄했습니다.
    웬만하면 고집스럽게 공략을 안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샘 앤 맥스처럼 취향에 안 맞거나
    스토리가 초반부터 몰아치지 않고 후반부부터 좋아지는 스타일이라면
    중도 포기가 많은 편입니다.
    루카스아츠 게임은 제 기준으로는 어려운 게임이 많았습니다.

    헤헤//
    트와일라잇 호텔은 같은 회사 게임인 번개전사 라이디를 리뷰할 때쯤에
    많이 검토를 했던 게임입니다.
    당시 다른 게임들과 중복되고 인상 깊은 점이 없어 할 말이 없겠다는 판단 하에 리뷰를 포기했었습니다.
    일단 신청을 받았으니 다시 한 번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만
    리뷰를 못 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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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글
    1. 한번 검토하셨던 게임이라면 리뷰요청은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검토하셨던걸 다시보게 하시는것보단 새로운 리뷰를 준비하시는게 저도 더 기대가 되네요

      대신 시기는 나중에라도 상관없으니 eve burst error를 포함 하는 이브 시리즈 전반에 대한 리뷰를 요청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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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디그 리뷰를 신청했던 것이 왠지 좀 후회가 되네요... 하지만 디그 리뷰를 통해서 백개먼님의 첫 어드벤처 게임에 대해 알게 되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저의 첫 어드벤처 게임은 브로더번드의 "라스트 익스프레스"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플레이를 포기 했습니다.
    제가 어드벤처 게임에 뛰어들게 한 작품은 루카스아츠의 "텐타클 최후의 날"입니다. "텐타클 최후의 날"은 개인적으로 지루한 게임이었습니다. 그래픽만 좋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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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미국 게임뿐만 아니라 미국 매체의 한국어 번역 다수는 번역질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번역체 문장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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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
    과거에는 노하우가 부족했던 탓인지 번역질이 특히 낮은 것 같습니다.
    지금같으면 간단하게 번역되도록 정립된 관용구조차도
    옛날 게임들은 빙돌아서 번역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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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헤헤//
    EVE 시리즈는 제가 할 말이 많은 시리즈입니다만
    시리즈 모든 게임을 리뷰하는데 적어도 7~8주는 소요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리뷰 스케쥴에 끼워넣기에는 너무 긴 기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10월달쯤에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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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 게임은 오래전에 해봐서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오프닝 브금이 상당히 좋았던 기억이.. 그리고 플레이타임이 생각보다 짧아 허무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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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gick//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길었다면 중도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어요.
    하지만, 스토리적으로는 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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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리뷰 재밌게 보고 있어요
    어린시절 디그하다 포기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뭐 어쩌라는건지 한참을 헤메다 포기..
    게임이 흥미롭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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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츄니//
    그 시절 어드벤처 게임의 난이도는 자비가 없었죠.
    인터넷 공략도 흔치 않은 시절이라
    많은 게임들이 게임 잡지를 팔아먹기 위한 수법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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