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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1일 일요일

리뷰 : 여계가족 ~음모~(2005/4/28, 실키즈)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계가족> 시리즈의 2편인 <여계가족 ~음모~>입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성 캐릭터로만 이루어진 가족의 유산 상속 스토리인데
비난을 쏟아냈던 전작과는 달리 제가 상당히 편애하는 게임이죠.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입지를 지닌 가문 아리미야의 당주가 
얼마 전에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주는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사망 당시에 그의 가족은 한참 젊은 후처와 세 딸뿐이었죠.



주인공은 그런 아리미야의 제3비서입니다.
재벌가의 제3비서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직함이지만
사실 심부름이나 하는 말단에 불과하죠.
제2비서인 쇼코도 그다지 권력을 갖고 있지 않고,
비서로서의 권력은 오로지 남자인 제1비서에게 몰려 있습니다.



하찮은 말단인 주인공따위가 재벌가의 유산을 노리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인데
사실 여기에는 뒷사정이 있습니다.

아리미야 가문의 유산 싸움은
표면에 드러난 재산을 갖고 다투는 싸움이 아닙니다.
아리미야의 빌딩에는 비밀의 방과 금고가 있는데
그 금고에는 국가에 신고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뒷돈과 금덩이가 모셔져 있죠.
아리미야는 이걸 토대로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니
여기의 재산이야말로 아리미야 가문의 가장 큰 힘인 겁니다.

근데, 당주가 사망하기 전날 비밀번호를 바꿔 버렸고,
그 누구에게도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고 사망해 버렸습니다.
상속권 유무에 관계없이 금고의 비밀번호를 찾아내는 자가 
아리미야의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거죠.


그리고 주인공의 숨겨진 정체는
과거 누명을 쓰고 쫓겨난 금고지기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아리미야의 재산을 손에 넣으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로 인해 주인공은 제3비서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봤자, 주인공도 비밀번호를 모르기는 매한가지지만요.



이 게임의 독특한 시스템은 선택지 방식입니다.
장소 이동의 선택지는 평범하지만,
그 외의 대사 선택지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르죠.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중요한 단어가 붉은 글씨로 뜨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붉은 글씨를 클릭하거나, 혹은 '신경쓰지 않는다'를 선택하면서 진행하는 겁니다..
붉은 글씨를 클릭한다면 주인공이 그 문제에 개입하는 시스템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에 몰래 잠입한 주인공은
메이드 에미리가 장녀 치사토에게 성적인 의미로 벌을 받는 것을 엿보게 됩니다.
치사토는 벌을 다 준 후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에미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붉은 글씨를 선택한다면,
주인공이 에미리를 위로해 주는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H씬까지 진도가 나가며,
결국 치사토에게 들켜 비서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배드엔딩이죠.
비밀의 방에 몰래 잠입한 일개 비서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설친 결과입니다.


이 시스템은 주인공의 처지와 잘 어울립니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주인공은 온갖 오지랖을 다 부리며,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에 다 개입하고 다니겠죠.

하지만, 이 게임의 주인공은 이 장소의 중심인물이 아닌 말단입니다.
다른 게임처럼 온갖 상황에 다 개입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거죠.
최종 목표를 위해 적당히 낄끼빠빠해야 됩니다.
주인공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과 아닌 일을 잘 구분하여
과감하게 신경쓰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죠.

반대로, 별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과감하게 발을 디딜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한 발 물러설 것인가를 선택하는 시스템입니다.



가족 구성원을 살펴 봅시다. 먼저 모친인 스미레입니다.
요염한 스타일의 몸매로 늙은 당주를 유혹했으며,
당주가 사망한 이상 아리미야 가문의 가장 웃어른이 되었습니다.
친딸은 없기 때문에 딸들과 사이는 매우 좋지 않고
모두 금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사이죠.

굉장히 음란한 본성을 갖고 있으며, 제1비서와는 밀통하는 관계입니다.
주인공을 유혹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는 생각도 하고 있죠.
스미레는 주인공에게 세 딸에게 여자의 즐거움을 알려 주라는 의뢰를 합니다.
보수는 스미레의 육체죠.



장녀인 치사토입니다.
설정으로는 주인공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인데
굳센 성격이고, 메이드들의 기강 관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메이드뿐만 아니라 여동생인 시온까지 고문합니다.
게다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레즈비언이죠.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찾아내야 합니다.



차녀인 미소라입니다.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아가씨죠.
유산에 대한 욕심이 매우 크기 때문에 자기 편을 갖고 싶어 합니다.
'스미레가 금고를 차지하면 우리는 쫓겨난다'며 언니인 치사토를 설득하기도 하죠.

철부지처럼 보이지만 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주인공의 정체도 단독으로 조사해 알아낸 후 자기 편으로 포섭하려고 합니다.
금고지기의 아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주인공은 쥐뿔도 아는 게 없습니다만 뭔가를 아는 척을 하기도 하고, 
스미레나 치사토와 손을 잡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막내인 시온입니다. 심약한 아가씨로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는 포지션입니다.

유산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중요한 캐릭터인데,
당주가 사망 전날 금고 비밀번호를 바꿀 때
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시온이었던 겁니다.
시온은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자기도 모르게 쥐고 있는 거죠.



캐릭터가 잘 짜여져 있는 것에 반해,
스토리가 빈약하고 H씬 위주로 흘러가는 점이 아쉽습니다.
좀 더 유산 상속과 얽힌 싸움을 보고 싶었지만
주인공이 위협을 느낄만한 강적은 존재하지 않았죠.

주인공에게는 운이 상당히 많이 따랐고,
전개도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스미레의 '세 자매에게 여자의 즐거움을 알려줘라'는 의뢰는
배드엔딩으로 가지 않으면 하루만에 클리어해 버립니다.
스미레조차 깜짝 놀랄 정도죠.


각각 캐릭터의 스토리가 
똑같은 스토리에 등장인물만 바꾼 수준에 그친 점도 아쉬웠습니다.
그렇다고 높이 평가할만한 배드엔딩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이 게임의 멀티 엔딩도 단순한 숫자 불리기였습니다.

ㄴㅇ루트를 따로 만들기도 했지만,
본편과 연결성도 없고, 개연성마저 날려 버린
외전 팬디스크 격의 스토리였습니다.
뭔가 반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기는한데
분량 문제 때문인지 결국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스토리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면
제가 그렇게 욕했던 1편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편보다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최소한 캐릭터와 설정을 살릴 정도의 분위기라도 만들었기 때문에
미흡할지언정 한 번은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총평하자면, 이 시기 실키즈의 게임 대부분에 내릴 수 있는 평가인
'멀티엔딩에 집착하지 말고, 제대로 된 단일 루트 하나를 만드는 게 낫다'에
정확히 부합하는 게임이라고 봅니다.
소재도 캐릭터도 분위기도 좋았어요.
정성을 다해 스토리를 다듬어서
단일루트 게임을 만들었다면 훌륭한 게임이 나왔을 겁니다.

만일 제가 실키즈를 잘 몰랐고
캐릭터나 분위기에 속아 이 게임에 좀 더 큰 기대를 걸었다면,
저는 이 게임에 가차없는 비판을 했을 겁니다.
멋진 소재를 반도 살리지 못했던 게임이라고 말이죠.


다만, 당시에는 꽤 좋아했던 게임입니다.
실키즈가 나사 한 두개 빠진 게임을 만들었던 건 언제나 있는 일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른 에로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소재가
언제나 저를 기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여계가족 2편은 그런 실키즈에 제가 기대했던 부분을
가장 많이 충족시켜줬던 게임입니다.
화려한 소재에 어울리는 그래픽,
상류층의 여성 캐릭터와 비교할 수 없는 말단인 주인공의 처지,
그러한 처지를 뒤집는 스토리와
상황에 걸맞는 선택지 시스템까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요소요소에서 적절한 설계를 했던 게임이었습니다.

이 게임 이후로 좀 더 발전된 실키즈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주기사 안젤리카> 리뷰에서 설명드렸던대로
실키즈는 오히려 다른 회사와 비슷한 소재로 눈을 돌려 버렸고
제가 기대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게임은 한참 후에나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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