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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0일 일요일

리뷰 : 카와라자키가 일족(하원기가 일족)(2)(1993/12/22, 실키즈)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천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리뷰는 둘로 나뉘어져 있으며 두번째 편입니다.


벌써 몇 번이나 언급한 내용입니다만
카와라자키가 일족은 에로게에서
저택물과 멀티엔딩 게임의 원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초는 아니라고 했죠.

저택물+멀티엔딩의 구성도 카와라자키가 일족 이전에 존재했습니다.
바로 RED-ZONE 이름 시리즈 중 하나인 <나오미 ~미소녀들의 관~>입니다.
이름 시리즈를 대충 리뷰할 때, 조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나오미 ~미소녀들의 관~> 역시 H씬도 과격하고, 섬뜩한 엔딩도 충격적입니다.

일본 위키에도 <나오미 ~미소녀들이 관~> 및 그 전의 멀티엔딩 에로게들을 언급하면서
카와라자키가 일족이 원조라는 건 잘못된 사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잘못된 사실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한 것과 그 시스템의 활용 방안을 제시한 것과의 차이죠.



카와라자키가 일족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나옵니다.
처음 플레이할 때, 대충 선택지를 고르다가 해피 엔딩을 보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시작하고, 그냥 일 안하고 뛰쳐 나오는 초반 엔딩이나
중반부쯤에 아리스를 건드리다 슌스케에게 살해당하는 엔딩을 보지 않는 한
무난하게 카오리가 방에 찾아오는 최후의 밤에 돌입합니다.
차에 치이고, 가위에 찔리고, 감금 당하는 등의 엔딩을 두, 세번만 보게 되면
이 게임의 최종 목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쳐 날뛰는 가짜 가족 일당들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거죠.
저처럼 미사코가 마음에 들어서 미사코와 함께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탈출을 목표로 신중하게 플레이해도 여전히 탈출하는 건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 게임은 마지막에 선택지 한, 두 개 잘 선택한다고
해피엔딩을 보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죠.

기껏해야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해서
평생 위협에 시달린다는 찝찝한 내용의 엔딩 뿐입니다.

운이 정말 좋아서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경우는 해피엔딩은 구경도 못하고 배드엔딩만 몇 번씩 보게 됩니다.
레이를 구출하는 엔딩정도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카오리를 구하는 엔딩은 짐작조차 안 가고,
미사코를 구하는 엔딩은 더더욱 오리무중입니다.



배드엔딩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익숙해질 정도가 됩니다.
처음에는 저택이 불타는 엔딩을 보고 소름이 돋은 플레이어들도,
계속해서 보다 보면 그냥 '잘 탄다' 이런 생각이나 들고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아무 생각이 안 듭니다.


단순한 선택지 게임인 카와라자키가 일족이 이렇게 난이도가 있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무의미한 선택지가 꽤 많다는 점입니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마지막 밤에는 선택지가 많아서
마치, 그 수많은 선택지를 잘 조합만 해도 해피엔딩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지 중 상당수가 사실은 뭘 고르든 엔딩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죠.
따라서, 마지막 날 직전에 세이브한 것을 로드해서 이런 저런 조합을 시도해봐도
이전에 길을 잘못 들어 섰다면 절대 미사코 해피엔딩을 볼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슨 선택지가 엔딩에 영향을 주고, 뭐가 영향을 안 주는지도
처음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간파하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논리적이나 도덕적으로 무슨 정답이 있는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죠.

거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서면 비교적 알기 쉬운 선택지가 나오지만
찔려 죽을래, 치여 죽을래, 아니면 타락할래 정도의 차이입니다.
해피엔딩과는 전혀 관계없어요.

오히려 엔딩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은 평일의 선택지가
미사코 해피 엔딩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선택지입니다.
평일에 행동을 어떻게 하든, 마지막 밤의 스토리는 비슷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평일의 행동은 스토리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해피엔딩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죠.
이 역시, 플레이어를 헷갈리게 하는 점입니다.


처음에 플레이할 때는 굉장히 혼란스럽지만
배드엔딩을 계속 보면서 게임의 전반적인 틀을 파악하다 보면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이 서서히 보이게 됩니다.
게임이 대책없이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플레이어의 생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밤 직전에 저녁식사를 한다/안한다의 선택지가 뜹니다.
저녁식사 정도야 가벼운 마음으로 먹으면 다 먹은 후에,
슌스케에게서 주머니에 담긴 무언가를 빻으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약에 중독되어 주인공이 야수화하고
카오리를 습격하는 전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약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녁식사를 안 먹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근데 약에 중독되지 않는 루트로 돌입하면 무조건 배드엔딩입니다.
오히려 약에 중독되어야 해피엔딩을 볼 수 있죠. 대표적인 함정 선택지죠.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가 하나하나 지뢰를 밟아가며,
다음 플레이에서는 그것을 피해 전진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저녁식사 선택지에서 저녁식사를 안 먹는다를 선택하면
슌스케가 주머니를 들고 주인공에게 지시할 타이밍을 놓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분기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이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거죠.

각각의 선택지를 하나씩만 보면 선택지에 정답은 없습니다.
왜냐면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나쁜 짓을 하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피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쌍한 미나의 경우는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피해를 덜 받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건 엔딩과는 별 관계 없습니다.


선택지 하나로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지만
게임의 전반적인 선택지를 파악하면 해피엔딩으로 가는
정답이 보이는 게 됩니다.

미사코 해피 엔딩을 예로 들어 봅시다.
마지막 밤에 여러 번 죽어가며, 선택지를 이것저것 선택하다 보면,
'미사코를 돕는다/ 카오리를 돕는다/ 레이를 돕는다'
세 가지 선택지가 뜨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사코를 돕는 것을 선택하면 주인공이 '미사코가 있는 장소를 모른다'고 합니다.



미사코가 잡혀간 장소는 최종 흑막인 할아버지가 있는 저택입니다.
난바라와 한 번 가기는 했지만 옆자리에 그냥 타고 있었을 뿐이니 길을 알 수가 없죠.

그 전날 직접 운전해서 저택으로 갈 기회가 있었지만 낮잠 자느라 못 갔습니다.
낮잠은 왜 잤느냐? 그날 낮에 레이와 H씬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미사코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레이와의 H씬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낮잠을 자지 않고,
미사코와 함께 할아버지가 있는 저택으로 가게 되고,
주소를 기억하여 마지막에 미사코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반복해서 배드엔딩을 보더라도 계속 플레이하게 되면 이런 내용을 파악할 수 있죠.


정리하자면, 카와라자키가 일족의 멀티 엔딩 게임 디자인은
단순히 '엔딩이 여러 개'인 것이 아닙니다.
'A를 선택하면 A루트/ A루트에서 1을 선택하면 A-1엔딩'같은
단순한 분기 시스템이 아니라는 거죠.

여러 배드 엔딩들은 플레이어에게 섬뜩함을 느끼게 하고
해피엔딩을 보고 싶은 욕구를 줍니다.
그와 동시에 반복 플레이를 통해 플레이어가 목적을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카와라자키가 일족을 자세히 플레이하면
이런 부분이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런 게임 디자인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요즘은 이정도 난이도의 게임은 짜증나서 공략집 보고 플레이하는 시대죠.

이런 스타일의 게임은 요즘 대세가 아닙니다.
요즘 게임들은 선택지가 거의 없는, 혹은 상당히 난이도가 쉬운 게임들 뿐이죠.

그런 비쥬얼 노벨 장르를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재미있게 한 비쥬얼 노벨이 상당히 많죠.
하지만, 모든 에로게가 그런 스타일로 흘러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주인공이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을 뿐만이 아닌
플레이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게임의 방향에 영향을 주는 게임을,
시행착오를 거치며 엔딩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에로게도
1년에 몇 개쯤은 나와도 괜찮잖아요.

저는 카와라자키가 일족을 처음 플레이할 때,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배드엔딩을 봤죠.
개고생도 재미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사코 해피 엔딩을 봤을 때는
고생이 보답받았다는 성취감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그때의 성취감을 최근에 다시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번 리뷰에서의 CG는 PC98판이 아닌 윈도우 이식판입니다.
스토리에서 아무 추가도 없었던 것도 아쉽지만
더더욱 아쉬운 부분은 읽은 문장 스킵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똑같은 대사인데도 읽은 문장으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2017년도에는 뜬금없이 아스트로노츠의 <백화요란의 관>과 콜라보된 게임도 나왔습니다.
내용물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 콜라보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총평하자면, 제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게임 시스템 디자인 부분입니다.
시스템 부분을 살려준 건 이 게임의 소재입니다.
단순한 연애 게임이고 그냥 여자에게 차이는 배드엔딩이었다면
이 시스템의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 했겠죠.

사운드, 스토리, 시스템 등이 잘 어울리는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다소 아쉬운 부분은 있죠.
윈도우로 리메이크할 때, 스토리와 캐릭터 부분을 보완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 부분이 보완된 작품은 다음에 리뷰할 <카와라자키가 일족2>입니다.

댓글 3개:

  1. 덧글은 지금 달게되지만 백개먼님 이 글을 정말 제가 박수치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멋진 글입니다

    사실 백개먼님이 리뷰해주시는 게임 중에 제가 실제로 해본 게 적어서... 다른 추천게임들도 그냥 그렇구나..글빨 죽이신다.. 하고 넘어가는 정도인데 하원기가는 제가 직접 해보기도 하고 너무 좋아하는 게임이기도 해서ㅎㅎ 더 각별하게 잘 쓰셨다는 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도입부에서 말씀하신 대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과 그 시스템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차이는 정말 큰 것 같네요.. 저도 백개먼님 글 읽고 하원기가의 멀티엔딩 시스템이 어떻게 플레이어들을 몰입시키고 유도하는지 처음 알게 된 것 같아요
    게임 구조 자체도 참 교묘하고 잘 짜여 있는데 그걸 파악하시고 필력으로 알기쉽게 풀어내신것도 놀랍네요ㅋㅋㅋ


    그나저나 저만 미사코 좋아한거 아니었군요 저도 미사코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끝까지 플레이했던 기억이 나요ㅋㅋㅋ 나중엔 공략집 봤지만.. 암튼 참 대단한 게임입니다
    리뷰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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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는 미사코-카오리 해피엔딩하고 카오리가 메이드로 미사코가 레이대신 둘째로 가서 일족이 되는 엔딩까지는 봤습니다만.. 베드엔딩이라는 일족이 되는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이벤트가 좀더 많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일족이 되었을때의 엔딩에서요. 근데 이게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과 세계관이 공유된다고하던데 맞나요? 카더라 통신으로 들은거지만 교복이 동일한 교복인 것이나 합본판으로 나온것이 동일 세계관을 연결했다고 하는 얘기를 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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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잡상다운족//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이야기는 저는 처음 듣습니다.
    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딱히 느끼지 못했고요.
    제가 뒷이야기를 잘 모르는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멀티팩으로 나온 건
    워낙 두 게임이 스토리 외적으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고
    당시 엘프 사가 워낙 많이도 우려먹었기 때문에
    세계관을 연결시킬 의도는 별로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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