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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9일 일요일

리뷰 : 시즈쿠(1996/1/26, Leaf)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Leaf사의 비주얼 노벨 1탄 <시즈쿠>입니다.
1탄이라는 의미도 대단하지만,
색다른 분위기로 인해 게임 자체도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96년도에 PC-98판이 발매되었고 같은 해 윈도우용으로 이식되었으며,
2004년도에 CG를 갈아엎고, 보이스를 추가하여 리뉴얼판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도에 리뉴얼판의 인터페이스만 약간 수정하여
<키즈아토> 리메이크판에 동봉하여 판매되었습니다.

이중에 96년도의 윈도우판, 2004년도의 리뉴얼판은 한국어 패치가 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았던 게임입니다.

이에 관련하여, 저는 시즈쿠 리뉴얼판을 지인에게 추천했다가 
욕을 거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추천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게
한국어 패치가 된 게임들을 이것저것 살펴 보면서
이런 게임도 있다고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뿐입니다.
<크로스 채널>이나 <파르페 ~쇼콜라 second brew~>같은 
제가 강력 추천했던 게임들을 거르고
잠깐 언급하면서 넘어갔던 시즈쿠를 본인이 선택해서 플레이했는데 
이게 어떻게 제 탓입니까?

말리지 않았던 잘못은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시즈쿠를 플레이하고 사오리 루트 엔딩을 봤는데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더라고 말하더라고요.
공략집 보고 해서 배드엔딩도 안 봤을 테고,
사오리 해피엔딩은 원래 충격적인 장면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네가 과연 루리코 루트를 보더라도 계속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하고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너 한 번 당해 봐라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거죠.

며칠 뒤, 엄청 화내더라고요. 플레이 감상이 어땠는지 물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화내는 건 좀 아니죠. 제 잘못이 아니니까요.
비유하자면, 제가 여러 우량주를 많이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지인은 잠깐 언급된 개잡주를 몰래 산 거죠.
저는 그게 폭락할 걸 알면서도 매도 권유를 안 하고 조용히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 잘못이 적지는 않군요.

근데, 저도 억울합니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거였다면,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제가 인정하는 명작인
<취작>이나 <엑스트라바겐자>같은 걸 시키고 욕을 먹었어야 했는데
시즈쿠에는 그 정도의 애정은 없는데요.

아무튼, 시즈쿠라는 게임은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있고
멘탈이 약하신 분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할 수 있습니다.
미리 경고하고 리뷰합니다.


 

대략적인 공통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수업 도중,
갑자기 같은 반 여성인 카나코가 갑자기 일어나서 '섹X'라고 외칩니다.
처음에 다른 학생들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깔깔대며 웃었지만,
곧 카나코는 본인의 얼굴을 피가 날 정도로 할퀴며
퇴폐적인 단어를 반복해서 외치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며칠 후, 주인공은 학교 선생이기도 한 자신의 숙부에게 호출을 받습니다.
숙부는 카나코의 일기를 조사한 결과,
야심한 밤에 학교에서 수상한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카나코 이외에도 여러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선생이 움직이면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밤의 학교를 조사한다는 SF 사이코 호러물입니다.



비주얼 노벨로서의 특징적인 부분은 텍스트가 빽빽하게 화면을 덮는 방식입니다.
비에로게인 <제절초>나 <카마이타치의 밤>에서 사용된 방법을
에로게에 적용한 거죠.
단순히 스타일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당대 평균적인 에로게들에 비해 심도있고 강렬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주인공이 지닌 광기에 대한 묘사도 깊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은데,
이게 너무 근거 없이 과해서 중2병처럼 보여 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수업중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섹X'를 외치는 캐릭터나,
하늘에서 전파를 수신하는 중이라고 하는 캐릭터들도 있는데
기껏해야 노트에 끼적거리면서 혼자 망상하는 것밖에 없는 주인공이
'광기'가 어쩌구 하는 건 허세같이 느껴집니다.

만화나 소설에서 중2병이나 허세 스타일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점점 그 정도가 강해지다 보니 결국 선을 넘어 버렸고
이제 그런 요소의 대다수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플레이할 때는 시즈쿠의 이런 묘사에 대해 거부감이 별로 없었는데
오랜만에 플레이해 보니, 주인공의 중2병 망상이 플레이할 때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시즈쿠가 발매되던 시기에는 큰 문제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트렌드가 달라져 버린 거죠.



또 아쉬운 점은 스토리가 너무 짧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이 조사 의뢰를 받고, 그날 하루 밤만에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됩니다.
광기, 호러나 서스펜스 요소가 좀 더 고조되지 못하고
스토리가 끝나 버려요.

일단, 주인공 캐릭터 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루리코 루트에서 주인공은 잡혀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모든 일에 도망치기만 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 장면 자체는 좋았지만 주인공이 진짜로 소극적이고 도망치기만 했는지 
공감이 잘 안 되었습니다.

숙부가 밤에 학교 좀 조사해 달라고 해도 그냥 수락할 뿐이었고,
다른 루트에서도 같이 조사하는 사오리나 미즈호를 열심히 구하려고만 했어요.
평범한 호구형 주인공으로 보였지
해야할 일에서 도망치는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토리가 길었다면 좀 더 주인공의 캐릭터 묘사를 충실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만악의 근원인 학생회장 타쿠야입니다.
독전파라는 초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MC물적으로 보면, '육체조작', '정신붕괴', '욕정강화' 등으로
비교적 초기 형태의 마인드 컨트롤 수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회장은 이 독전파를 사용하여,
카나코를 비롯한 학생회 여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 학생회장도 주인공 뺨치는 중2병입니다.
동어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광기를 어필하려고 하는데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플레이어한테 손발이 안 펴지는 독전파를 쓰는 것 같아요.



목격자 포지션의 배구부 소녀 사오리입니다.
음습한 게임 분위기를 일신해주는 밝고 
활달한 캐릭터로 많은 인기가 있으며 저 역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귀신 소문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주인공과 함께 조사하기로 합니다.
독전파에 조종당해 가위로 스스로를 찌르는 충격적인 엔딩도 존재합니다만
해피엔딩은 말씀드렸다시피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됩니다.
심한 일을 당하는 장면도 얼마 없고,
호러는 다소 약했다고 생각하지만 추격전은 나름 재밌었습니다.



스토리가 짧았던 점도 아쉬웠고,
뜬금없이 루리코의 등장으로 구출되는 것도 아쉬웠지만
멀티 엔딩 게임에서 보통 처음 보는 엔딩이라는 걸 감안하면 나쁘지는 않은 수준입니다.
사오리 루트에서 남은 건 사오리가 사랑스럽다는 사실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죠.



카나코의 절친한 친구인 미즈호입니다.
호러물에 빠질 수 없는 민폐 캐릭터입니다.

카나코가 그렇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밤에 주인공과 같이 학교를 조사하기로 합니다.
함께 조사하는 걸 수락할 때만 해도 '폐는 안 끼치겠다'는 
전혀 믿지 못할 말을 합니다.

학생회장과 대면하고 나서,
'독전파 같은 게 있을 리 없어요.',
'그게 진실이라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라며
큰 소리를 뻥뻥칩니다.

회장이 전파를 쏘고 사태가 진짜로 위험해지자,
주인공이 도망치자고 하는데 미즈호는
'카나코를 두고 도망칠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둘 다 잡히죠.
잡혀서 심한 짓을 당하고 나서야 도와줘, 용서해줘같은 말을 하지만 
독전파에 잡혀서 꼼짝을 못하는데 어떻게 돕겠습니까?

그러던 중, 독전파의 힘이 약해진 빈틈을 타서 
주인공이 미즈호를 구해내는데 성공합니다.
겨우 풀려난 미즈호는 다시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요.'를 시전하는데
제발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습니다.



미즈호가 조금 답답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얼마 전까지 친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으로 조종당해서 
정신을 잃고 자신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믿기 쉬운 건 아니죠. 
그들의 사이가 어땠는지 정확히 모르는 플레이어가 공감하긴 힘들지만
미즈호의 태도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결국, 카나코가 약간이나마 제정신을 차려서 구해준다는 엔딩인데
나름 감동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리 자체는 사오리 루트보다 좋아요.



옥상에서 전파를 수신한다는 소녀 루리코입니다.
학생회장의 여동생이기도 하죠.
루리코 루트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루트이기도 합니다.

사오리, 미즈호와 함께 조사를 둘 다 거절한다면
루리코와 함께 다니게 됩니다.

주인공은 미즈호가 학생회장의 독전파에 붙잡혀 
심한 짓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정도는 미즈호 루트에서 겪었던 일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충격적인 장면은 사오리 루트에서 아무 일 없이 무사했던 
사오리가 붙잡혀 있던 상태라는 점이죠.

사오리 루트에서 사오리에게 애정을 준 사람일수록
이 예상치 못한 NTR씬은 충격적입니다.
오랜만에 플레이였지만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오리가 흐느끼며 애원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마음이 아프네요.
최근 명작 게임중에 전편의 주인공을 잔인하게 죽인 속편이 욕을 많이 먹던데
그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아요.

어떤 루트에서는 특정 캐릭터에게 애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놓고,
다른 루트에서 그 캐릭터를 비참하게 ㄴㅇ한다는 건
지금 발매되는 게임에서는 맹비난이 두려워 감히 사용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멀티 엔딩 사용법으로 꽤 훌륭한 기교에요.

각 루트, 각 엔딩마다 예측할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기법인 거죠.
개인적으로 정석적으로 흘러가는 사오리나 미즈호 엔딩보다
전파가 폭주하는 토스터기 엔딩이나 
반전이 갑작스러웠던 카나코 번외 엔딩이 더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2004년에 나온 리뉴얼판입니다.
그래픽이 변경되었는데 원작의 느낌이 더 좋았다는 분이 많았습니다.
보이스가 추가된 건 좋았지만 
스토리는 큰 틀에서 변하지 않아 여전히 빈약했습니다.

2009년도에 <키즈아토> 리메이크에 동봉되어 판매되었을 때가 
이 게임이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때인데,
<키즈아토>를 기대하고 플레이했던 분들께는 
짧았던 스토리가 많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추천하지는 않는 게임입니다.
추천했다가 욕을 먹었던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 플레이해도 재미있을 정도의 스토리는 아닌 것 같아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짧은 스토리가 치명적입니다.
충격적인 광기를 다룬 작품은 이 이후에 많이 발매되기도 했구요. 

비주얼 노벨 초창기에,
선택지 게임과 멀티 엔딩 게임으로서 다양한 기교를 사용한 점은 훌륭합니다.
다만, 그런 요소들은 <키즈아토>에서 더 발전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시즈쿠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그 외, 리뷰에서 제대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BGM은 정말 좋았습니다.
원작과 리뉴얼판의 BGM 둘 다 마음에 듭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루리코의 해피, 트루엔딩은 일부러 리뷰에 적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진실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플레이하여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추천한 게 아니니, 제 욕은 하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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