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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6일 일요일

리뷰 : 시체를 닦다(2002/5/31, 실키즈)

* 이 리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닦다>는 제목 그대로인 게임입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오래 전에 플레이했던 게임인데
다른 요소들은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시체 닦는 장면이 강렬했던 기억만큼은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게임이죠.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의대 지망생으로 병원에서 개꿀 사무직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원장에게 불려가 여러 사정으로
지금처럼 편의를 봐주기 힘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부원장은 잠시만 다른 곳에 숨어서 알바를 하고 있으면
몇 달 후에 다시 개꿀 알바로 복귀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어려운 형편이었던 주인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 아르바이트란 연구용으로 기증된 시체를 닦는 아르바이트입니다.
시체를 닦는 곳은 지하실에 있으며,
부원장과 관계자 몇 명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이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도
병원 내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리뷰를 보시는 분중에 현직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시체를 닦는 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아닙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런 범상치 않은 일을 자세히 묘사했다는 점이죠.
시체를 닦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으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받는 정신적인 부담도 치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자료 조사를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아요.

광기나 호러 분위기를 만들려고 무리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오로지 시체닦이라는 행위를 자세히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러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가 정말로 잘 표현된 작품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주인공은 시체닦이 알바를 하게 됩니다.
부원장은 '하루에 시체 하나 닦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남은 시간에 공부할 수 있다'고 했지만,
공부는 개뿔 주인공은 남은 시간에 멘탈 케어하기도 바쁩니다.



주인공이 이 알바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시체닦이를 가르쳐주는 쇼겐과
시체의 정보 등을 알려 주고 여러 수속을 밟아주는 간호사 유키입니다.
 
근데 둘의 태도가 지나치게 사무적이에요.
안 그래도 멘탈 케어를 하기 힘들어 하는 주인공인데
치유계열 캐릭터 하나 정도 나와서 주인공을 품어줘도 괜찮잖아요.

게다가, 멀쩡한 시체만 담당할 거라던 설명과 달리
점점 상태가 좋지 않고 잔인한 시체들을 닦게 됩니다.
닦는 시체도 점점 늘어나 하루에 두, 세 개를 처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죠.
주인공의 정신적 부담은 점점 심해져만 갑니다.



사실 이런 안배에는 특수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과 더불어 부원장의 음모도 존재하죠.

이런 저런 요소들을 종합할 때, 광기, 호러물로서 굉장히 수준 높은 게임입니다.
갑작스럽게 충격을 주는 엔딩도 존재하고,
주인공이 완전히 미쳐버리는 광기 루트까지 존재하죠.



허나 전체적인 에로게로서 살펴 보자면,
저는 이 게임에 불합격을 주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게임을 옛날에 한 번 플레이했을 뿐인데,
시체를 닦는 묘사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외 스토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캐릭터 이름은커녕 얼굴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했죠.
그만큼 시체닦이 이외에 다른 요소들의 존재감이 희박했다는 겁니다.



부원장의 음모를 제대로 파헤치는 엔딩은 단 하나뿐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계속 휘둘릴 뿐입니다.

그렇다고 부원장의 음모를 파헤치는 루트가 제대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부원장에게 당했던 일들과 비교할 때,
거대한 음모가 지나치게 어이없이 해결되어 버리죠.



병원 접수처의 누님 캐릭터인 미와코 같은 경우는
메인 스토리와 전혀 어울리지 못 했습니다.
아예 이 캐릭터 루트만 다른 게임으로 만들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을 정도로
전혀 상관없는 스토리로 흘러 갔죠.



호러 분위기를 잘 조성해 놓은 보람은 있어서,
주인공이 부원장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거나, 
부원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미친 짓을 할 때는
나름 스토리에 강점을 보였으나,
다른 캐릭터들과 힘을 합쳐 부원장의 음모에 대항하는 스토리에서는
매우 큰 약점을 보였습니다.

아예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없었던 미와코는 물론이고,
중요한 역할을 맡아줘야 했던 유키와 마오조차도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죠.
여성 캐릭터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크게 실패하여 매력을 살리긴커녕,
충격적인 배드엔딩을 위한 부품에 불과한 캐릭터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총평하자면, 훌륭한 호러물이며 아쉬운 에로게입니다.
색다른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은 분께는 추천할만 하지만,
에로게나 미소녀 게임을 원하는 분들께는 많이 부족한 게임일 것 같네요.

다만,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만큼
실키즈의 멀티엔딩 시스템과 잘 어울리는 점이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멀티엔딩이라는 구조 속에서 충격적인 엔딩을 얼마든지 양산할 수 있었죠.
멀티엔딩을 추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실키즈로서는 드물게도,
소재만큼은 멀티엔딩과 잘 어울렸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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